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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10만리>20.끝.인도네시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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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인도에 이어 찾아간 곳은 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는 섬나라지만 무척 큰 나라다.이리안.수마트라 등 우리 한반도 넓이보다 훨씬 큰 섬들도 여러개 있다.이 섬들을 찾아 다니면서 취재해야만 하니 교통편의 어려움은 물론 탐사 기간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적도 부근에 위치해 있는 상하의 나라 인도네시아에 우리와 비슷한 문화가 있을 것인지.
발리섬.
오래 전부터 우리의 머리 속에 환상의 섬으로 알려진 곳이다.
자카르타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1시간여의 비행 끝에 발리섬의 덴파사르 비행장에 내린다.
탐사팀은 우리나라 어느 대학교수의 정보에 따라 제주도의 돌 하루방과 모양이 같은 물건을 찾으러 발리섬 동북부 산속에 있다는 베사키사원을 찾아갔다.베사키사원은 발리섬에서도 손꼽히는 힌두교 사원.
그러나 탐사팀이 혈안이 돼 찾는 돌 하루방은 아무 데도 없다.이래서 또 한번 헛걸음친다.
일정 때문에 서둘러 돌아오는 길에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닭싸움이었다.
발리 사람들이 하는 것은 보통 닭싸움이 아니었다.싸움닭의 한쪽 발목에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묶고 어느 한쪽의 닭 목숨이다할 때까지 싸우도록 하는 내기 닭싸움이다.거기에다 웃기는 것은 닭싸움도 현대화됐는지 복싱경기처럼 라운드가 있다.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조그만 통을 두드려 종료를 알리는 소리를 낸다.그러면 싸움닭의 주인들은 자기닭을 붙잡고 쓰다듬어주기도 하고,부리에 입을 맞춰주며 사기를 돋운다.그런데도 닭싸움은대개 3라운드를 넘어가지 못한다.닭의 천부적 무 기인 부리나 발톱에 의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이 달아놓은 예리한 칼날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닭싸움이 성행했다.그중에는 인도네시아처럼 내기 닭싸움도 했다.그러나 상대방 닭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한 칼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았다. 다음날 탐사팀은 어느 마을에서 와양(그림자 연극)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부리나케 그 마을로 찾아갔다.마을에 들어서자 널찍한 마을회관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서성거리는 것이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우리나라에서는 불과 80년전만 해도와양꾼들이 장터를 돌면서 그림자 연극을 했다고 한다.이윽고 마을회관 무대위에 조그만 스크린이 설치된다.
이윽고 스크린에 그림자가 나타났다.먼저 스크린 양쪽에 산과 나무 모양의 배경이 들어서고,이어 그림자 연극의 주인공들이 나타났다.마을사람들의 눈동자가 스크린에 고정된다.와양은 남녀의 연애를 소재로 한 코믹한 내용이었다.남녀가 손을 파닥거리며 붙잡을 때엔 순진한 관중들은 좋아서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그날이 발리섬에서 보낸 마지막 밤이었다.
자카르타로 돌아온 탐사팀은 이제 탐사의 마지막 종착역을 향해간다.8개월간의 문화탐사를 마무리 짓는 장소로 예정된 곳은 인도네시아의 가장 동쪽에 있는 슬라베시(세레베스)섬 북쪽 끝 항구도시 마나도.
『어어…저 사람들 좀 봐!』 탐사팀이 마나도 공항에 내려 지른 첫소리였다.마나도는 분명 인도네시아 땅인데도 사람들의 얼굴생김새나 피부 빛깔이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과 똑같아 무엇인가 탐사팀을 기다리는 것이 있을 것만 같다.아니나 다를까 탐사팀의그러한 예감은 적중했다.탐사팀도 놀랄 수밖에 없는 기막힌 우리의 문화를 하필이면 마나도에서 찾아낸 것이다.
『선녀와 나무꾼』이야기는 우리나라만의 것이 아니었다.인도네시아 슬라베시섬 마나도라는 곳에도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었다.
***선 녀가 내려왔다는 마을은 입구에서부터 느낌이 달랐다.
고색 창연한 옛 묘지.묘마다 우리나라 무덤처럼 비석에 청태가 끼어있는 것을 보면 족히 수백년은 됐음직하다.마을 사람들을 따라가보니 마을이 끝나는 곳에 과연 아름다운 연못이 있다.쉰살 이 넘은 마을 지도자는 묻지도 않은 설명을 덧붙인다.
『1년에 한번씩 이 연못가에서 축제를 하지요.당신들은 먼 코리아에서 왔다니 꼭 보고 싶다면….』 그래서 그날밤 탐사팀은 그 마을 지도자의 호의로 축제를 보게 된다.이윽고 어둠 속에서하얀 드레스를 입은 이 마을의 예쁜 처녀들이 선녀로 분장하고 흰 나비처럼 사뿐사뿐 춤을 추면서 연못가로 접근한다.그녀들이 춤추는 모습은 맑은 연 못 속에 그림자를 만들며 따라 움직여 태고적 전설의 밤 속에 들어와 있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그날밤그녀들은 분명히 하늘에서 목욕하러 내려온 선녀들의 모습이었다.
『선녀와 나무꾼은 그 이후 어떻게 됐소?』 『아하,당연하지요.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마을 지도자는 손을 들어 고색 창연한 공동 묘지쪽을 가리켰다.
『바로 저분들을 낳고… 저분들은 이 마을에서 사는 우리를 낳았지요.』 이 마을 사람들은 바로 자기네들이 선녀와 나무꾼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얼마나 멋지고,거기다 현장감까지 있는가.
탐사팀은 슬라베시섬의 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지고 온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을 이 땅에 심어 놓았을 것이다.필자는 여러 가지의 개연성을 생각해 보느라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그 가운데서도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 동화책에서 읽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적어도 2천년 이상 오래된 이야기인데 도중에 끊기지도않고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내려 왔다는 기막힌 사실이었다.
탐사팀은 슬라베시섬의 문화 취재를 마지막으로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그때쯤 탈진한 탐사 대원의 머리 속은 온통 고향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한반도를 향해 가는 비행기 안에서 탐사팀 모두 역경의 연속이었던 지난 날을 되돌아 보는지 조용하다.
글.사진=김병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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