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 중국 올림픽의 아버지 王正廷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국 최초의 국제올림픽위원회 종신위원이었던 왕정팅

지난 3월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5차 회의에 저장(浙江)성 대표로 참가한 텅터우촌 당위서기 푸치핑(傅企平)은 펑화(奉化)의 수이우창(稅務場)촌을 올림픽 성화 교체 지점으로 채택해줄 것을 건의했다. 왕정팅(王正廷, 1882∼1961)의 고향 마을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를 계기로 지난 반세기 동안 잊혀졌던 왕정팅이라는 인물이 하루아침에 관심의 대상이 됐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왕은 고향에서 교회 학교를 마치고 1896년 톈진(天津) 북양(北洋)대학에 2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톈진은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 YMCA)를 중심으로 체육활동이 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1897년 11월 처음 개최된 교내 육상경기에 참가하면서 체육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1899년 미국인 선교사의 제창으로 4개 대학 연합운동회를 조직할 때 간사로 참여했고 1902년부터 톈진 YMCA가 주관한 톈진 운동회를 내리 3년간 직접 조직했다. 졸업 후 도일(渡日)해 중국YMCA일본지부(支部)를 결성했고 미국에 건너가 미시간대학과 예일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후 11년에 귀국했다.

그는 현대체육의 중요성을 이해한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중국을 대표해 필리핀·일본과 함께 동양 최초의 국제적 체육단체인 원동체육협회(遠東體育協會)를 조직했고 13년부터 시작된 아시안 게임의 전신인 원동운동회(遠東運動會, Far East Games)를 상하이에 유치해 중국 최초의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20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원동체육협회를 정식으로 승인했고 22년 그를 중국 최초의 IOC 종신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34년 일본이 만주국(滿洲國)을 원동체육협회에 가입시키려 하자 중국은 탈퇴했고 협회와 운동회는 해체됐다.

왕정팅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 파리강화회의 전권대표, 중소(中蘇)교섭 전권대표, 중국대학 총장, 두 차례의 외교부장, 재정부장, 국무총리 대리, 주미대사, 참의원 의장, 중국적십자사 총재, YMCA 전국협회 총간사 등을 역임했다.

푸치핑의 건의가 있고 난 후 “잊혀진 외교관” “중국 현대체육의 비조(鼻祖)” “중국 올림픽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게 됐다.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