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⑨ 옌안의 밤 사로잡은 江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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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상하이에서 란핑이란 예명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장칭.

1933년 봄 배우가 꿈이었던 19세의 칭다오(靑島)대학 도서관 직원 리윈허(李雲鶴)는 부두 창고에서 공산당에 입당했다. 영문과의 셰익스피어 강의를 몰래 듣다가 쫓겨난 후였다.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톈진(天津)시장이 된 황징(黃敬)의 소개로 당에 들어갔다.

30년대의 상하이(上海)는 하루 아침에 기적을 일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좌익단체에 가입한 탓에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연극 평론가 탕나(唐納)의 도움으로 ‘인형의 집’에서 노라 역으로 출연하며 란핑(藍 )으로 개명했다. 호평을 받았고 잡지 표지에 얼굴도 실렸다.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170여 개의 공연장과 관람석 10만을 자랑하던 영화의 중심지에서 그는 삼류배우였다. 36년 탕나와 결혼했는데 황징이 지난(濟南)에서 소식을 전했다. 허위로 가득찬 도시를 떠난다는 편지를 남기고 지난으로 갔다. 탕나가 따라와 죽는다고 강물에 투신했는데 수영을 잘해서 미수에 그쳤고, 황징은 혁명 근거지 옌안(延安)으로 떠났다. 탕나에게 끌려 돌아와 보니 다른 스캔들이 파다했다. 탕나는 또 자살을 기도했고, 란핑은 영화사에서 해고당했다. 겨우 23세 때였다.

상하이는 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전쟁과 혁명의 시대였다. 중ㆍ일전쟁 폭발 직전인 37년 8월 옌안으로 갔다.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에 입학하며 이름도 장칭(江靑)으로 바꿔버렸다.

옌안의 황혼은 경극(京劇) 공연과 함께 하는 날이 많았다. 장칭은 항상 주연이었다. 경극 애호가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은 장칭의 연기와 노래를 들으며 담배가 끝까지 타들어 가는 것도 몰랐다. 분장실까지 찾아와 뜨거운 차를 권하는 마오의 손끝을 본 장칭은 사진을 한 장 선물했다. “그 사진은 오랫동안 주석(主席)의 노트 사이에 끼여 있었다”고 마오의 비서는 훗날 말했다. 마오의 두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과 장칭이 동굴 속에서 충돌했다고들 하지만 장칭은 허쯔전이 시안(西安)으로 떠난 직후에야 옌안에 도착했다. 장칭의 옌안 진입은 빠르지도 않았고 늦지도 않았다.

상하이를 떠날 때 치파오(旗袍)를 찢어버린 장칭은 1991년 5월 14일 자살하는 날까지 다시는 치파오를 몸에 걸치지 않았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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