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헌법 논의와 사회계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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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다행히도 공식적인 출범도 하기 이전부터 혼선을 거듭하여 의회정치는 물론이려니와 정치 전반에 대한 국민적 회의와 실망을 증폭시키는 듯 보였던 18대 국회가 뜻밖에도 한국 민주정치의 재건작업을 발 빠르게 시작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민주정치를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궤도에 진입시켜야 할 때라는 판단이 18대 의원들 사이에서 이심전심으로 확산되어 여야를 떠나 과반수가 넘는 170명의 의원이 국회미래한국헌법연구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국가 운영의 토대가 되는 기본규범과 규칙을 국민적 합의로 가다듬어 보자는 작업에 이미 돌입하였다. 이러한 의원들의 판단은 널리 퍼진 국민적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민주정치 발전을 위하여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하겠다. 단순한 헌법 개정 논의의 수준을 넘어 한국 정치의 기본 골격과 운영시스템에 대한 전반적 건강진단을 시도하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헌법 개정의 필요 여부를 포함한 국민적 논의는 한국 정치가 당면한 다음 두 가지 과제를 풀어가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첫째로,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전자정보화 시대의 선두주자를 자처하게 된 한국으로서 정보혁명이 수반한 사이버 민주주의시대에 걸맞은 대중의 정치참여 방법을 민주정치의 안정적 운영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선에서 개발하는 과제다. 둘째로, 경제와 문화 등 여러 차원에서 이미 국제 공유의 기준을 택한 것이 우리 한국이라면 민주정치 운영의 핵심 주체인 정당체제도 후진성과 예외성을 탈피하도록 과감히 개혁하는 과제다. 아무리 남북관계의 특수성이 있더라도 ‘인권, 개방, 반독재, 반핵’이 유독 한국에서만 진보정당보다는 보수정당의 정강처럼 통용되는 비정상적 정당체제는 조속히 개혁되어야 한다.

우선 새 시대에 필요한 민주정치의 새로운 틀과 규칙을 만드는 범국민적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 대한민국에는 ‘헌법은 있지만 사회계약은 없다’는 현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되겠다. 아무리 훌륭하게 준비된 헌법이라도 이를 존중하고 지키겠다는 국민적 약속과 의지가 없으면 사상누각이 될 뿐이다. 국가가 추구하는 기본 가치와 목표는 무엇이며 사회 보존과 국가 운영을 위한 정당한 규칙은 어떠하여야 되느냐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약속, 즉 사회계약이 국민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을 때에 비로소 헌법은 살아 숨쉬는 공동체 운영의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약속에 참여한 국민은 헌법을 준수해야 할 시민의 의무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 사회계약과 헌법 논의를 동시에 추진하는 범국민적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국회는 이번 가을 정기국회가 시작하는 대로 여야 합의로 이러한 논의를 주관할 헌법특위를 출범시키리라고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구성된 국회특위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입장을 국민들 앞에서 공론화하는 공청회를 운영하여 어느 집단도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기회를 못 가졌다는 불만이나 불평의 여지가 없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 의사의 집결 과정을 거쳐 상당한 수준의 국민적 합의와 사회계약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되면 2009년 정기국회에서 공식적 개헌절차를 밟을 수 있을 것이다.

건국 60주년 헌법 제정 60주년을 맞는 올해에 우리는 한국의 민주정치에 새로운 기초를 다지고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자유국가에서만 가능한 진지하고 건설적인 국민적 대화로 이 기회를 반드시 살리도록 노력하자.

이홍구 전 총리·본사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