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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이스다’ 양보 못할 존재의 증명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2호 24면

박찬호의 전반기를 요약해 보자. 메이저 잔류마저 불확실하던 그는 불펜에서 잘 던져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다저스의 4~5선발이 흔들리자 선발 기회를 잡았다. 잘 던졌고 한 자리를 굳힐 찰나 일본인 마무리 투수 사이토 다카시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다저스의 조 토레 감독은 셋업맨 조너선 브락스턴을 마무리로, 노련한 박찬호를 셋업맨으로 돌렸다. 박찬호로선 아쉬울 따름이다.

투수들이 선발(Starter)에 집착하는 까닭은

야구의 고전 『야구란 무엇인가』의 저자 레너드 코페트는 선발투수의 덕목을 세 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구질, 둘째는 체격, 셋째는 장래성이다. “감독은 팀에서 가장 우수한 투수들을 자주 마운드에 올리고 싶어 하게 마련인데 그가 바로 선발투수다.”

우수한 투수들은 스피드를 갖추고 있다. 여기엔 반드시 ‘제구가 되는(command)’ 공이 필요하다. 스피드와 제구가 어우러진 공을 던지는 투수는 ‘에이스’다. 1990년대 후반 보스턴의 주전 포수였던 스콧 해터버그는 USA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한 투수를 언급했다.

“마치 기교파 투수처럼 던진다. 그러나 구위는 타자를 압도한다. 그는 규칙적으로 자신이 정말 던지고 싶은 코스(hits his spots)에 던지기 때문에 공 받기도 쉽다.”-스피드와 제구가 어우러진 20세기 대표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뉴욕 메츠) 얘기다.

그레그 매덕스

스피드가 없으면 선발은 불가능한가. 2001년 월드시리즈 끝내기 안타의 주인공 루이스 곤살레스의 말을 들어 보자. “그를 볼 때마다 화가 피카소가 생각난다. 어떤 공이든, 어떤 볼카운트에서든 자기가 그림 그리고 싶은 걸 그려 낸다.”-‘마운드의 교수’ 그레그 매덕스(샌디에이고)를 두고 한 말이다. 마르티네스와 매덕스에 대한 평가에서 묘한 차이, 그리고 그들이 택한 길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매덕스도 신인 시절 마이너리그에서 145㎞ 이상의 빠른 공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어깨의 힘을 빼고 타자와 승부하는 데 집중했다. 마르티네스는 타자와의 승부보다 자기 만족을 위해 피칭하는 경우가 많다. 매덕스가 별다른 부상 없이 통산 350승 대업을 달성한 반면 마르티네스는 부상으로 시즌을 접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결정적인 순간의 강렬함도, 시대를 뛰어넘는 롱런도 위대한 선발투수의 특징 중 하나다. 63~65년 다저스에서 전설을 쓰고 팔꿈치 부상으로 사라져 간 샌디 쿠팩스와 40세가 넘어서도 활약하는 제이미 모이어(필라델피아) 모두 대단한 선발투수다. 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내며 ‘남김 없이 자신을 불태운’ 롯데 최동원은 에이스 중 에이스다. 20여 년 동안 통산 200승·3000탈삼진의 기나긴 여행을 해온 송진우(한화)는 또 어떤가.

선발에서 밀린 선수가 중간계투로 나서곤 했지만 요즘 같은 분업화 시대엔 오히려 중간투수들이 더 빠른 공을 갖고 있기도 하다. 또 언제든 나갈 수 있는 빠른 워밍업과 연투가 가능한 선수가 중간-마무리로 나선다.

선발투수는 워밍업이 오래 걸리고 연투보다 긴 이닝을 던진 뒤 휴식이 필요한 스타일이 적합하다. 명투수 워런 스판은 등판에 앞서 타자를 하나하나 철저히 분석하며 자신만의 게임을 준비하고 구상하는 습관을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세밀화 그리는 선수와 밑그림 그리는 데 어울리는 투수가 따로 있는데, 선발은 바로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선발투수의 휴식일은 휴일이 아니다. 또 다른 전투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아직도 한국 프로야구에는 ‘하루 던지고 4일 쉬니 선발이 좋다’는 선수도 있는데, 이런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약물 복용으로 오명을 썼지만 지난해까지 한국에서 뛴 리오스는 많은 한국 투수에게 메시지를 던졌다. 던진 다음날부터 러닝 또 러닝. 그것이 리오스의 훈련 키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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