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눈물 머금고 내수시장 돌아오는 비단장수 ‘왕 서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 포목점에서 여직원이 중국산 비단을 펼쳐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지금 그룹차원에서 지원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갈수록 수출이 어렵다고 하는데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국내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실크로드(絲綢之路)그룹 링란팡(凌蘭芳) 회장의 말이다. 외국 바이어의 가격인하 압력이 갈수록 거세지고 대금결제도 지연되면서 공장 자금회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링 회장의 이러한 발언은 그룹 계열사 고위 임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레드오션인 국내 내수시장으로 눈을 돌리라는 말이 타당한가?’ 임원들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링 회장의 마음 역시 편할 리 없다. 그러나 그룹의 연간 비단제품 수출액이 2억~3억 위안에 달하는 반면 순익은 겨우 500만~600만 위안에 머물러 순익률이 2~3%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면 수긍이 간다. 게다가 최근 미국과 유럽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수요가 줄면서 외국 바이어들은 중국 일변도에서 탈피해 더욱 싼 가격에 공급이 가능한 동남아로 눈을 돌리고 있다.

결제 지연 역시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뒤에서 팔짱만 끼고 있다. 경기 과열과 고물가를 잡기 위해 긴축정책을 펴고 있다. 과도한 무역흑자 역시 줄여나갈 것임을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있다. 위안화 환율 절상폭도 최근 2년 새 15%를 넘어섰고, 수출 때 돌려받는 세금 환급률도 크게 낮아졌다.

반면 원재료 가격과 인건비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아 비단 등 섬유제품 수출은 이미 ‘넛 크래커(Nut Cracker)’ 신세가 된 지 오래다.

실크로드그룹 같은 중견 수출업체뿐만 아니라 멍눠(夢娜)기업처럼 연간 매출액이 10억 위안을 넘는 대형 수출기업 역시 두려움에 떨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3월 24일 이우(義烏)시 세무국장이 멍눠 쭝구인(宗谷音) 회장을 갑자기 방문했다. 그는 쭝 회장에게 수출 증치세 환급을 엄격히 집행하라는 방침이 내려왔으니 3개월 내 관련 신고를 마치라고 요구했다.

세금 환급신청은 여러 복잡한 사항이 관련되어 3개월 내 신고가 도저히 불가능한 실정으로 쭝 회장은 그저 쓴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멍눠, 실크로드그룹, 푸르(孚日), 다양촹스(大楊創世) 등 주요 방직품 수출업체들은 2006년에 이미 수출환경 악화를 예상하고 대책을 마련해 왔다. “결국 국내시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수출만 고집한다면 살아남을 기회조차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링 회장은 한숨 쉬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중국산 방직품의 내수 비율은 2007년 초 66.8%에서 11월에는 75%로 올라갔다. 중국 런민(人民)대학 상학원 무역학과 왕야싱(王亞星) 부주임은 “일부 방직기업은 이미 수출위주에서 내수위주로 방향전환을 함으로써 본격화하는 수출 위험에 대처하고 있다. 그러나 중대형 수출기업만이 그나마 브랜드 광고와 유통망을 구축할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중소업체로서는 문을 닫거나 업종전환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끝나버린 낮은 원가 시대

거칠 것 없이 앞만 보고 질주하던 쭝 회장도 이제는 ‘Made in CHINA’ 제품의 저원가 생산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멍눠 역시 더 이상 외국 바이어의 주문에만 의지할 수 없다고 보고, ‘레드오션(Red Ocean)’ 시장인 국내로 회귀해 3000여 개에 달하는 양말 제조업체와 생존을 위한 전면전을 펼칠 각오다.

멍눠는 내수시장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자 2000년대 들어 마케팅 중점을 수출로 전환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현재 멍눠는 갈림길에 서있다. 그동안 축적한 수출업무는 국내시장에서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수경험 역시 전무한 실정이다. 이로 인해 처음부터 다시 내수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데서 오는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유통망뿐만 아니라 인맥관계도 경쟁업체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도 수천 가지나 되는 양말 브랜드 속에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입해야 하는지 앞이 캄캄하다. 멍눠의 현재 연간 생산능력은 약 4억 켤레로 이중 3억 켤레를 해외에 팔고 국내시장에 파는 물량은 4분의 1이 채 안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수시장 공략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방직 수출업계가 직면한 어려움은 앞으로 최소 5년은 지속될 것으로 업계에서는 내다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세계 가발대왕’으로 불리는 루이베이카의 행보는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정유취안(鄭有全) 이사장은 국내 가발시장이 앞으로 큰 호황을 누릴 것이며 매출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신감은 회사가 가격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수출 실적도 좋고 무엇보다 지난해 시험 삼아 국내시장에 진출했을 때의 성공적인 성과에서 비롯된다. 루이베이카는 2007년 베이징 등 주요 도시에 직영 매장을 잇달아 열었다. 지난해 총 매출 13억6000만 위안 중 국내 매출은 1038만 위안으로 1%도 채 안 되지만 2006년과 비교해 44.4% 증가하는 호조를 보였다.

“나 역시 국내시장 매출 비중이 최소 50%에 달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아프리카, 유럽시장 매출이 계속 호조를 보이고 있는 반면 국내시장 개척에는 최소 3~5년의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정 이사장은 밝혔다. 앞으로는 연구개발과 마케팅 역량을 강화해 고급제품 생산 비중을 늘리는 한편 전체적인 생산량은 점차 축소할 방침이다.

사실 루이베이카뿐만 아니라 멍눠, 실크로드, 다양촹스 등 많은 기업의 생각 역시 비슷하다. 경쟁이 치열한 저가 상품보다는 고급 상품 위주로 나간다는 것이다. 멍눠는 최근 디즈니, NBA 등과 브랜드 라이선스 관련 협상을 했다. 이들과 손잡음으로써 브랜드 가치를 높인다는 복안이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멍눠와 푸르는 거액을 투자해 올림픽 관련 제품 후원업체로 참가했다. 실크로드그룹 역시 신제품을 홍콩에서 먼저 출시한 이후 중국시장에 내놓을 방침이다. 소비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홍콩 브랜드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다.

변화와 혁신 물결도 속도가 붙고 있다. 정 이사장은 내수시장 공략을 전담하는 새로운 연구개발 조직과 마케팅 팀을 만들고, 이들에 대한 대우 역시 업계 최고 수준으로 약속했다. 루이베이카는 마케팅본부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보다 참신하고 능력 있는 인재 채용을 위해서다.

링 회장은 “성과가 좋지 않더라도 변화와 혁신, 발전 가능성만 있으면 인정하고 지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익이 나는 조직이라도 혁신 마인드가 없으면 지원도, 보상도 없다”고 말했다.

생산기지 이전도 고려 대상이다. 쭝 회장은 인도와 베트남, 캄보디아 중 하나에 생산공장 건설을 검토 중이다. 링 회장 역시 비용이 저렴한 중서부 내륙지역으로의 이전을 고려 중이다. “하루빨리 환상을 버려야 한다. 중국은 이미 고비용 시대에 진입한 지 오래”라고 말하는 정 이사장 역시 공장을 동남아로 이전할 준비를 마쳤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