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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합리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의 조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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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민은 17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국정을 이끌어나갈 주도권을 주었다. 또한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에는 여당의 독주를 견제할 감시의 역할을 맡겼다. 정치권은 이 같은 총선 민의를 깊이 새겨야 한다.

열린우리당은 집권 후 국회에서의 열세로 뜻대로 할 수 없었던 각종 개혁 입법의 추진동력을 총선 승리로 확보했다. 민주노동당 등의 협조를 얻을 경우 이 같은 개혁 작업에는 드라이브가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파장은 국정 전반의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민심은 당초 개헌선까지 거론되던 여당에 꼭 필요한 만큼의 의석만 주었다. 동시에 한나라당엔 사실상의 양당구도에서 여당의 파트너로 발언권을 행사하는 데 충분한 의석을 주었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총선 전에 목표했던 '원내1당'과 '개헌저지선'을 확보한 만큼 각각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하겠다.

이제 남은 과제는 정치권이 민의를 국정에 제대로 담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의 대화를 통한 국정의 쇄신이 바로 국민의 명령이라고 본다. 어느 쪽이든 독선과 오만은 사후에 국민의 엄중한 문책을 받을 것이고 그것이 역사의 교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큰 차이가 없는 두당 간의 정당 득표율에서도 이 같은 정신은 반영되고 있다.

수십년간 누적된 나라 전반의 문제점들을 하루 아침에 뜯어고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각 당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자세로 꾸준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정치권은 분열된 국론을 다시 모을 책임이 있다. 어느 당 할 것 없이 선거운동 과정에서 계층간.세대간.지역간 대결을 부추기는 언동을 했다. 선거가 끝난 지금 더 이상의 분열 조장은 안 된다. 상대를 공격하던 상극.공멸의 정치를 접고 상생.공존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 각 당은 신속히 당 내부를 정비하고 여야.정당간 대화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동시에 국민은 흥분이나 감정과잉의 상태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제 총선은 끝났다. 우리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돌아 보아야 한다. 왜 우리가 목소리를 높이고, 갈등하고, 싸웠는가.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는 단 하나여야 한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정치권 대화의 화두는 앞으로 우리가 무엇으로 먹고 살 수 있는가로 좁혀져야 한다. 지난 1년간 나라 전체가 일은 하지 않고 목소리 높여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싸우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고 과연 이 나라가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가. 이제는 정말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 누가 이기고 지고가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모두가 각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일을 해야 한다. 촛불집회, 장외투쟁을 이제는 거두어야 한다.

정치의 불확실성도 상당 부분 해소됐다. 이제는 재계가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유보해 왔던 투자도 과감히 하고, 고용증대와 경기활성화에 기여해야 한다. 노동자들 역시 우리 경제가 고비에 처해 있다는 점을 인식해 함께 살아가는 길을 모색해 주기 바란다.

정부는 대통령이 직무정지 상태인 비상상황에서도 선거를 원만히 치러냈다. 헌재의 결정이 끝날 때까지 각종 정책들이 차질없이 추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안보환경에 대해서도 추호의 틈을 보여선 안 된다.

총선 후에도 정국의 불안요인은 남아 있다. 대통령 탄핵 심판이나 대선자금 수사 결과는 언제든 나라를 격변과 갈등으로 몰아갈 파괴력이 있다. 이런 사안이 법절차에 따라 합리.정상적으로 처리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총선에도 재연된 영남과 호남 등 일부 시.도의 특정 정당 싹쓸이 현상은 걱정되는 일이다. 우리 정치의 고질인 돈선거.조직선거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유독 지역주의만 맹위를 떨치니 안타깝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해결 방안을 정치권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거 후 처리도 중요하다. 특히 불법 선거운동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궁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당선무효가 아무리 많아도 괜찮다. 엄격하고도 공정한 법집행이 필요하며 처벌의 잣대가 여와 야가 다르고 권력의 강하고 약함에 따라 달라지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