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이 삼촌의 꽃따라기] 날개하늘나리, 높은 여름산의 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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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여름은 ‘나리’의 계절이다. 울릉도의 섬말나리를 비롯하여 말나리·참나리·중나리·털중나리·땅나리·하늘나리·하늘말나리 그리고 ‘얼짱나리’라고 불리는 분홍빛의 솔나리까지 숱한 백합속 가문의 후예들이 여름 내내 많이도 피어난다.

올해는 높은 벼랑 위에 서서 하늘을 향해 피어난 솔나리를 꼭 담아보리라던 소원도 이뤘다. 그러나 I am hungry! 인터넷에서 하늘나리 사진을 본 뒤 밀려드는 배고픔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날개하늘나리는 강원도 이북의 높은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식물이라 야생에서 만나는 일은 내게 멀고 먼 일로나 여겨졌다. 그런데 그 사진 자료 중에 줄기의 날개를 보여주는 것이 있었다. 화살나무의 가지에 달린 날개처럼 생긴 그것을. 오, 그랬다. 그래서 날개하늘나리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이후로 날개하늘나리에 대한 동경심은 더욱 커졌다.

자생지는 아니지만 날개하늘나리를 심어놓은 곳이 있다. 얼마 전까지 전주수목원이었다가 이름을 바꾼 한국도로공사수목원에 가면 구경은 어렵지 않다. 이 꽃이 워낙 귀하다는 얘기를 들어서 혹시 이 수목원의 것이 원예종 백합이 아닐까 하고 반신반의해온 터라 확인도 할 겸해서 얼마 전에 다시 찾아가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로 줄기에 날개가 달려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야생 날개하늘나리를 보고싶은 생각은 누를 수 없었다.

그러다 중나리를 찾아 아주 높은 산을 오를 기회가 있었다. 새벽길을 달려가서 오르기 시작한 산은 높고 험했다. 전날 내린 비로 불어난 계곡들을 어렵사리 건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고 또 올랐다. 꽃사진 찍는 것이 낭만이라고 생각하면 나의 고향 ‘오산’이다. 잠과 밥은 뒷전에 놓고 체력전을 펼쳐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마침내 정상에 발을 올리고 나니 천상의 초원지대다. 맑게 갠 날이라 구름과 어울려 환상의 풍경이었다. 정상 부근의 초원지대는 여름꽃의 천국인 경우가 많은데 그곳도 그러했다.

이 꽃 저 꽃에 포커스를 맞추며 산행 후의 보람을 즐기다가 문득 커다란 나리에 시선이 꽂혔다. 심장이 요동쳤다. 이렇게 큰 꽃으로 피는 건 딱 한 가지뿐인데? 줄기 쪽에 날개가 있으면 그건데?? 으아, 날개가 있네??? 화살나무처럼! “와, 날개하늘나리다! 날개하늘나리다!” 하고 몇 번이고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꽃이 제대로 피지는 않았지만 내가 야생 날개하늘나리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알았다. 우리가 꽃에 미친 게 아니라 꽃이 우리를 미치게 한다는 사실을.

찾으려던 중나리는 한 포기도 못 봤지만 날개하늘나리 하나로 나는 날개 단 사람처럼 하루 종일 공중을 떠다녔다. 지금껏 겨드랑이가 근질근질하다.

글·사진 이동혁(http://blog.naver.com/freebo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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