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지킬 힘 없으면 평화 맛볼 자격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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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 02면

포츠머스(Portsmouth)는 일본의 야심을 생동감 있게 간직하고 있다. 독도의 비극이 굳어진 곳이 포츠머스다. 그곳에서 한 세기 전(1905년 9월)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 운명을 놓고 흥정했다.

박보균의 세상 탐사

미국 동부 뉴햄프셔주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 미국의 중재로 러일전쟁을 끝내는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나는 거기서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한다. 전쟁 100주년 기념해인 4년 전 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갔을 때다. 두 가지 분노와 한심함이 내 가슴에 솟구쳤다.

조약 체결 장소는 포츠머스의 미 해군기지 안에 남아 있다. 붉은색 벽돌의 평범한 3층 건물은 100년 전 그대로였다. 2층의 조그만 전시실에는 당시 긴박했던 협상의 자료·조약문·깃발·펜·사진·테이블·기념엽서 등이 놓여 있었다. 자료에는 러시아 발틱 함대와 결전을 앞두고 일본 연합 함대가 독도를 강점했다는 설명도 있다.

전쟁 승자는 일본이다. 포츠머스 조약은 조선을 망국의 길로 내몰았다. 두 달 뒤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전시물의 컨셉트는 ‘평화’였다. 내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강대국에는 포츠머스가 평화였다. 그러나 가난하고 허약한 조선의 백성은 나라를 잃는 절망이었다. 이런 기록문도 있다. “나라를 지킬 힘과 능력이 없으면 평화를 맛볼 자격이 없다.”

전시관 큐레이터의 말은 나를 더욱 우울하게 했다. “내 기억으론 이곳을 공부하러 온 한국의 역사학자·외교관은 없었다.” 그 속엔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 야욕을 고스란히 간직한 포츠머스, 동해가 일본해로 바뀐 것도 이 조약에서다. 그런데 이곳을 찾지 않고 등한히 하느냐는 은근한 핀잔 같았다. 한국 역사학계와 외교계의 게으름을 질타하는 듯했다.

역사 연구에서 현장 추적은 으뜸이다. 포츠머스의 일본 대표는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다. 고무라는 일본 외교의 노하우로 전수되고 있다. 고무라의 외무성은 한·일 병탄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독도 문제의 전략적 사령탑은 외무성이다. 우리 학계의 고무라 연구는 빈약하다. 일본 외무성을 깊게 해부한 연구서는 찾기 힘들다.

일본은 성공했다. 독도를 국제 분쟁화하려는 의도는 성과를 얻었다. 독도 영유권의 해설서 명기 논쟁에 대해 주변국은 빠졌다. 미국은 ‘한·일 양국 문제’라며 중립을 지켰다. 중국 정부도 특별한 반응이 없다.

일본이 주기적으로 독도 도발에 나서는 대담함은 어디에서 오나. 그들은 한국의 취약점을 파악했다. 한국의 독도 열기는 절대적이다. 학계의 독도 연구도 많다. 그러나 대부분 국내용이다. 민족주의 감정이 짙다. 정부는 실효 지배를 외치지만 실천은 느리다. 사이버 외교단 반크, 캐나다 사서 김하나씨 등 젊은 세대의 독도 열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말로 배부르고 내실이 부족한 허점을 일본이 놓칠 리 없다.

정치권에선 독도 포퓰리즘이 넘쳐난다. 특별법을 만들고 대마도를 되찾자고 외친다. 해경 대신 해군을 보내자는 주장에 기웃댄다. 해군력으로 따지면 일본은 압도적이다. 해군력 계산은 이지스함의 보유 숫자다. 일본이 6척인데 한국은 올해 말에 한 척을 실전 배치한다. 독도 해전이 벌어지면 어떨까. 이순신 장군이라면 모를까 전력 수치로 따지면 한국이 패배한다.

국제 공조는 중요하다. 그러나 한·미동맹이 헝클어져 힘들게 됐다. 미국은 일본·호주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외칠 때, 일본이 독도를 떠들 때 독자적으로 대응할 처지다. 제3자인 미국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 노무현 정권의 어두운 외교 유산이다.

동북아 정세는 한 세기 전과 비슷하게 짜여 있다. 독도의 전략적 위상은 커졌다. 일본은 김정일 정권의 급변 사태까지 염두에 두고 독도를 다루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과거 정권과 다를 것인가. 이 대통령의 진정한 실용주의를 적용할 대상이 독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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