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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공헌’ 폼 나고…‘절세 효과’ 실속 있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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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 12면

박용성(사진 왼쪽) 두산그룹 회장은 최근 중앙대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현대백화점·유진그룹·대교 등도 학교를 인수했거나 인수를 추진 중이다. 중앙포토

#1. 충북 청주의 서원대는 지난주 내내 뒤숭숭했다. 현대백화점 그룹이 14일 이 대학을 인수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16년 동안 내홍을 겪고 부채가 많은 학교를 정상화해 지역 사회에 공헌하려고 한다”는 게 현대백화점 측의 설명이다. 대학을 운영해온 서원학원 측은 반발하고 있다. 이 대학 윤갑수 팀장은 “현 재단이 학교를 넘길 의사가 없는데 왜 나서는지 모르겠다”며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 구성원 중 재단 측을 편드는 이는 거의 없다. 이 대학 교수회의와 총학생회는 현대백화점의 발표 직후 환영 성명을 내놓았다. 총동문회와 지역 시민단체들도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들 잇따른 대학 인수 왜

#2. 중앙대 교수 50여 명은 15일 경남 창원의 두산중공업 공장을 방문했다. 지난달 이사장으로 취임한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의 제안에 따른 것이다. 단과대별로 모두 12번에 걸쳐 열리는 이 행사엔 500여 명의 교수가 참석할 예정이다. 방학 중인데도 전체 교수 900명 중 70% 이상이 참석 의사를 밝힌 것이다. 안상두(화학과 교수) 기획조정실 부실장은 “우려도 있지만 대기업이 재단에 참여함으로써 과감한 투자로 학교가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기업과 학교의 ‘만남’이 부쩍 잦아졌다. 서원대와 중앙대 외에도 11일 명지외고가 교육기업인 대교에 인수됐다.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 중인 광운대도 유진그룹을 대학 운영에 참여시킬 예정이다. 전체 이사 7명 중 4명을 유진그룹 측 인물로 채우는 내용의 정상화 방안이 교육과학기술부에 올라가 있다. 경기대도 기업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이달 말까지 인수 희망 기업의 신청을 받을 예정인 이 대학 이태일 총장은 최근 “깜짝 놀랄 만한 대기업이 운영 의사를 타진했다”고 말했다. 하나금융그룹은 은평 자립형사립고 설립을 추진 중이다.
 
누이 좋고
학교들은 기업의 참여를 반기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심각해진 재정난을 타개할 다른 묘책이 없기 때문이다. 중앙대는 두산이 인수하기 전 대학병원 신축 등으로 700억원이 넘는 부채를 안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원대와 경기대도 만성적인 운영난에 시달려 왔다. 수입을 등록금에만 의존하는 천수답식 운영을 해온 탓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4년제 사립대학의 등록금 의존율은 2001년 70.1%에서 2006년 77.4%로 높아졌다. 미국 사립대의 등록금 의존율이 40%대인 것과는 큰 차이다.

이같이 재정구조가 허약한 상황에서 출산율 저하로 대학 입학 연령층이 줄어들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정부는 2004년 대학 정원 축소에 나섰다. 1990년대 들어 대학 설립 규제 완화로 사립대 숫자가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난 상태에서다. 건물만 지어 놓으면 학생이 모이던 1980년대와 달리 치열한 신입생 유치 경쟁을 벌여야 했다. 재원 부족으로 투자를 하지 못하고, 투자를 안 하니 학생이 외면하는 식으로 악순환에 빠진 대학이 늘어났다. 하지만 속 시원한 해결책이 없었다. 수도권 사립대학 중 절반가량이 재단 전입금이 한 푼도 없을 정도로 사학재단의 재정상태는 열악하다. 동문이나 기업의 기부금도 2001년 이후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이 같은 상황이 대학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기업에 러브콜을 보내게 한 것이다. 기업 우산 속에 들어가면 투자 재원을 충당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졸업생 취업 등 부수적인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는 96년 삼성이 재단에 참여한 후 연간 1000억원이 넘는 돈을 지원받고 있다. 덕분에 전체 예산 중 등록금 비중이 60%에서 40%로 낮아졌는데도 교수 숫자는 458명에서 700명가량으로 늘었다. 이 대학의 반도체학과와 휴대폰학과는 취업 보증수표로 통한다. 정몽준 의원이 이사장인 울산대도 연세대·고려대에 버금가는 재무상태를 자랑하며, 졸업생도 높은 취업률을 보이고 있다.

유진그룹의 운영 참여를 앞두고 있는 광운대의 김상훈 부총장은 “정보기술 특화대학인 우리 학교에 기업이 들어오면 재정 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산학협력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매부 좋고
한국엔 아직 ‘군사부일체’나 ‘사농공상’이라는 유교적 관념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래선지 대기업 총수도 학교법인 이사장 자리를 소중히 여긴다. 두산그룹 박용성 회장은 요즘 거의 매일 중앙대로 출근한다. 단과대를 돌며 교수들을 만나고 학교 발전 방향에 대한 의견을 직접 e-메일로 보내기도 한다. 북일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북일고와 북일여고의 입학식·졸업식에 해마다 참석한다.
학교 운영은 실속도 있다. 사회공헌활동을 한다는 명분과 함께 기업 이미지 향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교수와 학생은 물론 동문까지 막강한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대학병원 등 학교가 보유한 유·무형의 자산도 활용가치가 높다. 성균관대·중앙대·인하대·울산대 등 기업이 주인인 대학엔 대부분 의과대학이 있다.

학교 인수 및 유지 비용은 기업 입장에선 싼 편이다. 프로야구단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라이온스구단에 광고·마케팅비 명목으로 200억원 이상을 지원했다. 두산과 한화 등 야구단을 운영하는 다른 그룹도 100억원이 훨씬 넘는 금액을 지출했다. “이 정도 금액이면 대학 하나를 과감히 육성할 수 있다”는 게 기업 관계자 얘기다. 실제 인하대·항공대 등 4개 대학과 중학교·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한진그룹이 한 해 지원하는 돈이 통틀어 200억원 정도다.

절세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현행 세법은 기업이 사립학교에 기부하는 돈을 이익금의 50% 한도에서 비용으로 인정해 준다. 순이익이 1000억원이라면 500억원까지 비용으로 처리하며 기부할 수 있다는 얘기다.
 
독립 운영이 관건
기업이 학교, 특히 대학을 운영하는 것은 한국을 제외하곤 보기 힘든 일이다. 미국에선 기업이 대학에 많은 금액을 기부해도 직접 대학을 인수하거나 소유하지 않는다. 외국어대 임기영(경제학) 교수는 “하버드·예일·컬럼비아 등 미국 아이비리그의 톱 클래스 대학들은 철저히 자체 운영하고 있다”며 “밴더빌트대나 카네기멜런대처럼 특정 가문이 세운 학교도 설립자나 후손이 학교 운영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영대학원인 노스웨스턴대의 캘로그스쿨이나 MIT의 슬로언스쿨처럼 기업 돈으로 설립된 대학도 기업 이름만 붙어 있을 뿐 간섭을 받지 않는다. 모든 대학이 국립인 유럽에선 기업이 대학 경영에 참여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다. 국내 기업의 학교 인수에 대해 “학문의 독립성과 교육의 보편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상명대 박거용(대학교육연구소장) 교수는 “기업이 영리집단인 반면 학교는 비영리집단”이라며 “경영 효율성을 높여야겠지만 학교를 주식회사처럼 운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서원대 박상영 기획홍보처장은 “지방에선 등록금을 기업 운영자금으로 활용하려고 대학을 인수하는 중소기업도 있었다”고 말했다.

기업 울타리에 있는 게 대학의 자립 능력 배양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회의론도 적지 않다. 레미콘 회사가 인수했던 주성대는 회사의 부도로 학교까지 어려워졌다. 대우그룹이 인수한 아주대와 쌍용그룹이 인수한 국민대도 외환위기 여파로 두 그룹이 해체되자 상당기간 침체를 겪어야 했다.

사학진흥재단 이상도 전문위원은 “운영이 어려워진 사학재단을 맡을 주체가 기업밖에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라면서도 “기업은 대학 경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되 교육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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