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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기본기 다지는 ‘임헌정 사운드’ 2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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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손이 정말 시렸어요.”

지휘자 임헌정(55)은 부천 필하모닉(부천필)과의 첫 해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1988년 창단된 이 오케스트라에 89년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다. “공연장은 둘째치고 연습실도 없었어요. 겨울이면 손이 곱아 호호 불어가며 연습하던 단원들이 생각나요. 월급도 턱없이 적은데 그 고생을 했으니….”

그나마 정규 단원은 20여 명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최소 규모라도 맞추기 위해서는 객원 연주자를 30명 이상 불러야 했다. “모차르트·슈베르트밖에 못했어요.” 고전·낭만주의 초기 시대의 작품이 부천필의 연주 목록 중 대부분을 차지했다. 비교적 적은 악기와 소박한 음색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이기 때문이다. 꼭 20년 전의 일이다.

임헌정의 꿈은 높은 곳에 있었다. 그는 ‘굵직한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오케스트라’라는 미래를 보고 부천필을 이끌었다. 20년 동안 오케스트라 ‘농사’를 지은 임헌정과 부천필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20주년 기념 음악회를 연다.

성년을 맞이한 부천필은 한국의 오케스트라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 작곡가의 작품 전체를 연주하는 ‘전곡 연주’의 트렌드를 만들고, 한국에서 생소했던 작곡가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는 부천필의 고유한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전곡’을 유행시키다=“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 것.” 임헌정이 부천시에 내건 첫 조건이다. 이 이상적인 제안은 공무원들의 고민 끝에 수락됐다. 임헌정은 단원 영입부터 시작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연주자를 데려다 수석 자리에 앉혔다.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피’는 오디션을 통해 영입했다.

이렇게 구성된 멤버는 91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7곡을 전부 연주하면서 ‘전곡’ 행보를 시작했다. 협연하는 피아니스트를 바꾸며 9일 동안 공연, 음악계에 충격을 던졌다. 이후 베토벤·슈만 교향곡 등을 모두 연주하는 것은 물론 ‘바르토크의 밤’ ‘베베른 서거 50주년 기념연주’ ‘브람스 페스티벌’ 등을 통해 한 작곡가의 세계를 샅샅이 살펴보는 아카데믹한 연주를 부천필의 고유한 브랜드로 만들었다.

99년 시작한 말러 교향곡 전곡(10곡) 연주는 전곡 연주의 결정판이었다. 국내에서는 잘 공연되지 않았던 말러를 관객에게 알리기 위해 ‘말러 서적 전시회’ ‘공연 전 해설 공연’ 등을 열었고 말러 캐릭터 상품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말러는 국내의 많은 교향악단이 즐겨 연주하는 레퍼토리가 됐다. 말러 시리즈의 성공은 부천필에 2005년 호암 예술상을 안겼다. 부천필이 지난해 시작한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9곡) 연주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한국 음악계에 의미 깊은 시도다.

◇다시 기본으로=“연주자가 연주 잘하는 것밖에는 바랄 게 없죠.” 20년 동안 부천필을 이끈 임헌정의 꿈은 오히려 소박하게 바뀌었다. “창단 당시에는 연주 실력이라는 걸 논의할 수조차 없던 상황이었는데 여기까지 왔어요. 이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서 실력을 단단하게 할 거예요.”

말러를 유행시키고, 브루크너의 산맥을 넘으면서 “다음 시리즈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온 까닭이기도 하다. 또다시 화려하고 거대한 작품으로 관객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에 임헌정은 음악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부천의 ‘홈그라운드’ 팬들이 “베를린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PO), 부천엔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PO)”라며 열광하는 부천필은 당분간 기본에 충실한 연주로 팬들을 만날 전망이다. 20주년 기념공연은 22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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