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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김정일체제 '종말의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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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 북한에서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예컨대 해외 주재 북한 외교.무역 종사자들의 망명과 김정일(金正日)의 전동거녀였던 성혜림(成蕙琳)자매의 망명및 사회안전부 소속 북한군 하사 조명길의 평양 주재 러시아 무역대표부에서의 총격등은 김 정일지도체제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음을 의문의 여지없이 보여주었다.여기서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은 「체제를 지켜야 할 책임을 지닌 지배층구성원의 탈출 또는 저항」이라는 사실이다.
동서고금의 혁명사를 살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혁명적 분위기 성숙의 중요한 신호는 「체제 수호자들」의 태도 변화다.그것은 대체로 세가지로 표출된다.첫째,술과 여자에 빠져 잠시라도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될대로 되라」형(型)이다.둘 째,해외로 이주해 조용히 살든가 망명해 적극적 투쟁에 들어가는 「해외탈출」형이다.셋째,내부에서 비판 또는 저항을 구체적으로 전개하다 투옥 또는 처형되는 「전투적 반항」형이다.
동유럽과 옛소련에서 공산체제가 붕괴하던 때도 예외없이 그러한일들이 벌어졌다.그런데 동유럽이나 옛소련과 다르다는 북한에서도이 세가지 징후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최근의 사건들은 말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최근의 사건들만 가지고 북한에서 김정일지도체제가,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주의체제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가 곧 붕괴하리라고 예단하기는 어렵다.다시 동서고금의 혁명사를 보거나 동유럽과 옛소련에서 공산체제가 무너지던 때를 돌이켜 보면 대중의 조직적 반란이 반드시뒤따라야 한다.그런데 북한에서는 그것이 일어날 개연성이 낮아보인다. 대중의 조직적 반란이 일어나려면 대중이 우선 현존 체제를 지탱하는 이념에 대한 신뢰를 잃어야 한다.아니 그것만으로는부족하다.그 다음으로 기존 이념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념을 수용해야 한다.이 두가지가 짝을 이룰 때 대중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북한에서는 기존 이념,예컨대 주체사상 또는 「우리식 사회주의」가 비록 강도(强度)는 떨어지고 있으나 여전히 신봉되고있다.반면 자유민주주의나 자본주의라는 대체 이념의 수용은 낮다. 대중의 조직적 반란이 일어나려면 또 억압능력에 약화가 나타나야 한다.특히 최고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따라 손발처럼 움직이는 특수 군대와 특수 경찰의 사기가 결정적으로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기강이 예전만 못한 것같지만 그들은 여전히 어떠한 조직적 민중 봉기도 무력으로 진압하겠다는 결의에 차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김정일지도체제가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북한이라는 국가와 사회주의체제와는 구별되는 김정일지도체제는 이미 취약점을 전 세계에 드러내고 있다.「종말의 시작」은 조하사 사건을 통해 극적으로 나타난 것 이다.
국제적으로 드러냈다는 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 국내적으로도 감출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사회안전부 소속 병사가 북한 경비병들을 사살한뒤 러시아 무역대표부에 뛰어들어가 망명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북한주민들 사이에 빠르게 전파되 면서 대중은「체제 영생불멸」의 신화가 깨지고 있음을 직감할 것이다.억압체제에 허점이 뚫렸다는 현실 앞에 공포심이 완화되면서 그동안 거세됐던 저항의식이 서서히 자라게 될 것이다.
이미 만성적이 돼버린 굶주림,그리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체제의 무능력,그러면서도 개인숭배와 헌금을 계속 강요하는 이 괴이한 신정(神政)체제에 대한 반감은 그 저항의식과 결부될 것이다.이렇게 되면 김정일지도체제를 뒷받침하는 억압 기구들 내부에서 김정일 제거가 음모될 수 있다.김정일지도체제는 「종말의 시작」에 들어섰으며,이로써 북한 전체가 그 끝을 알기 어려운 「격변의 열차」에 몸을 실은 셈이 됐다.정부로서는 여러 시나리오를 가상하고 다각적 대책을 빈틈없이 세워야 할 것이다.
金學俊 단국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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