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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 멋쟁이가 돌아왔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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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04면

영화39 놈놈놈

시작은 1990년 ‘장군의 아들’이었다. 일제강점기라고 하면 절망에 빠진 서민, 안중근 의사, 유관순 누나만 떠올리며 숙연하던 사람들의 가슴에 근사한 수트를 떨쳐입고 호쾌한 주먹을 날리는 멋진 오빠도 있구나 하는 설렘을 안겨줬다. 임권택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느라 지친 상황에서 가벼운 액션 영화를 만들며 휴식하는 셈치고 만들게 된 작품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임 감독은 “100년 가까운 먼 옛날로 돌아가서 우리만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게 아니냐”고 걱정도 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모던한 풍경의 경성에서 펼쳐지는 리얼한 주먹 액션과 남자다운 캐릭터는 젊은 세대에도 어필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대륙으로 질주하는 모던 보이- 이념에서 폼생폼사로

그리고 올해는 광활한 만주 대륙을 질주하는 조선의 모던 보이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이 등장했다. 김지운 감독은 서부극을 찍을 수 없을까 궁리하다가 이만희·신상옥·임권택 감독 등이 흥행시킨 1960~70년대 ‘만주 웨스턴’ 영화를 보게 됐다면서 “한국 영화의 어려운 상황에 돌파구를 마련하는 오락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말 달리며 총싸움하는 상업적 액션영화를 찍으려면 일제시대 만주라는 배경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영화39모던보이39

‘놈놈놈’에서 20세기 초 열강의 각축장인 만주는 무정부주의적 다국적 문화가 뒤죽박죽 소용돌이치는 기이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고증에 한 발을 딛고 창조성을 더한 세트와 의상소품은 다채로운 이국 풍물과 빈티지 취향이 넘쳐나는 감각의 향연이다. 기차·잠수종·마구·총 등 구릿빛 기물의 광택이 번쩍이고, 말·오토바이·지프가 뒤섞여 총질하며 달리는 황토빛 사막 위에 고색창연한 폭탄이 터진다.

청나라 때 감춰둔 보물지도를 찾는 세 ‘놈’은 모두 톡톡 튀는 개성을 지녔다. ‘이상한 놈’ 송강호는 코믹하고 귀여운 분위기로 영화를 주도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쌍권총을 쏘며 종횡무진하는 그는 알록달록 깔깔이와 가죽 오토바이캡, 고글로 멋을 낸 열차강도다. ‘나쁜 놈’ 이병헌은 하얀 셔츠에 블랙 수트를 입고 스모키한 눈화장으로 성격을 드러냈다.

칼을 쓰는 마적단 두목 역을 맡아 잔혹하고 광기 어린 연기를 펼친다. “마적이 기차표 들고 기차 탄답니까? 세워야죠.” 꽃미남 정우성은 ‘좋은 놈’을 맡아 터프하면서도 부드러운 이미지를 만들었다. 중절모에 부츠 신고 롱코트를 펄럭이며 말 위에서 기다란 장총을 철컥철컥 돌려 쏘는 백발백중 현상금 사냥꾼인 그는 ‘원칙이 있는’ 남자다. 영화는 별 대사도 없이 이렇게 멋진 세 남자의 통쾌하고 매혹적이고 재미있는 모습을 현란하게 교차 편집한다.

굳이 세세한 내러티브를 구축하지 않아도 열차강도 장면, 장물시장 패싸움, 마지막 추격전 등의 스펙터클한 비주얼은 스토리텔링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그렇게 영화는 나라 잃은 절망을 뒤로하고 멋과 스타일을 향해 달려간다. 이미 다른 역사극들도 시대의 의미를 찾고 정치적 꿈을 복원하던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멋진 폼, 이국 취향, 빈티지 미장센을 추구하는 오락적 경향으로 가고 있다.

경성 최초의 라디오 방송에 뛰어든 독립운동가의 이야기 ‘라듸오 데이즈’나 문화재 절도범과 독립군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다룬 ‘원스 어폰 어 타임’ 등 최근 영화들은 철없는 모던 보이와 우국지사를 나란히 등장시키면서도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는다. 이런 경향은 미시사(微視史)와 신역사주의 영향으로 권력투쟁이나 민족 갈등 같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소재보다는 심미적 소재로 관심을 돌리는 사상적 흐름과도 관련 있다.

하지만 올 하반기 개봉 예정인 ‘모던 보이’의 정지우 감독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던 발칙한 모던 보이가 사랑하는 여자를 뒤쫓으며 어떻게 시대의 현실과 마주하고 갈등하고 변화를 겪게 되는지 그리려 한다”고 말한다. ‘놈놈놈’의 김지운 감독 역시 “우리 지도의 위쪽이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면 오늘 한국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면서 “대평원을 질주하는 것은 위로 막힌 반도에 사는 한국인의 민족적 판타지”라고 말했다.

‘놈놈놈’을 비롯해 일제시대가 배경인 영화들에서는 현대화에 대한 열망과 민족주의적 열망이 동시에 느껴진다. 친일 논란 끝에 흥행에 참패한 영화 ‘청연’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대중성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오락성을 극대화해 칸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월드 버전과 달리 “한국 버전에서는 욕망·꿈·이상 이런 걸 쫓아 달려나가는 사람들의 절절한 모습이 보이도록 편집했다”는 감독의 진심이 오락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어떻게 전해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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