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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 춘향은 식민지와 근대화의 산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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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06면

사진 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프로이트에 따르면 공포란 유년 시절 억눌렸던 욕망이나 문명화 과정 중 억압된 미신이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불시에 우리를 습격할 때 얻어지는 감정이다. 이 때문에 3류 장르영화로 치부되는 공포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 사회가 억압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극장에 들어선 대다수 관객이 마치 메스나 핀셋을 든 임상의처럼 피가 튀고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화면을 보면서 문명비판가나 심리분석가연한 태도로 공포영화를 보지는 않는다.

장정일이 만난 작가 - 영화·문학 연구자 백문임

오히려 공포영화 앞에서 즉물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신체다. 공포에 억눌린 만큼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심장의 박동과 호흡은 증가하고, 좀 더 많은 빛을 받아들여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동공은 커지며,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공포에 대항하거나 잽싸게 도망하기 위해 근육은 수축된다. 이뿐만이 아니라 피부를 미끈거리게 해서 쉽게 적에게 잡히지 않으려는 방어작용은 온 땀구멍으로 진땀을 쏟아낸다.

공포영화를 볼 때 인간의 체감온도는 1~2도 낮아진다. 공포에 대면한 자기보호 본능이 살갗의 온도(에너지)를 빼앗아 심장이나 뇌와 같은 중요 부분으로 에너지를 돌리기 때문이고, 진땀이 식으면서 관객은 또 한번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대개의 공포영화는 수박과 모기와 샌들을 신은 아가씨들이 쏟아지는 여름에 맞추어 개봉된다. 오늘의 초대손님은『월하의 여곡성』(책세상, 2008)이란 제목의 한국공포영화사를 출간한 백문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그녀는 수박도 아니고 모기도 분명 아닌 게 맞지만, 샌들을 시원하게 신고 나왔다.

“국문과에서 공포영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하면 ‘재미있는 거 하시네’ 그러고는 모두들 입을 다물죠. 귀신영화라면 일단 오락물이라고 생각하지 진지한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장르영화에 대한 이런 편견이 비단 공포영화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한국 사람들은 더더욱 공포물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공포영화는 에어컨도 없고 바캉스도 즐기지 못했던 시절의 납량물 정도로만 대접받죠.

하지만 공포영화는 사회적 격변기의 불안감이 투사된 장르로,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괴물(monster)은 그 영화가 만들어진 사회와 문화가 지워 없애고자 했던 가치들이 왜곡되고 굴절된 형상으로 드러난 거죠. 서양의 대표적인 괴물인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는 각기 부르주아의 통제를 벗어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빅토리아조의 숨막힐 듯한 성도덕을 아노미 상태에 빠트리는 섹슈얼리티의 현현으로 은유됩니다.”

1990년대 초반에 국문학과 대학원을 다녔던 백문임씨는 문학연구를 하면서 접하게 된 마르크스주의·비판이론·정신분석학·페미니즘 등이 서구에서는 영화학을 장(場)으로 하여 가장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영화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지녔다. 이른바 ‘영상문화’가 도래하던 시기였다. 그때 많은 동료는 영화학과 박사과정으로 진학을 했지만, 지은이는 인문학의 기반 위에서 영화연구를 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기에 자신의 전공을 고수했다.

“‘여고괴담’(박기형) ‘가위’(안병기) ‘소름’(윤종찬) ‘장화, 홍련’(김지운) ‘분신사바’(안병기) ‘분홍신’(김용균) ‘아랑’(안상훈) 등등이 보여주듯이 우리나라 공포영화의 단골 주인공은 여귀(女鬼)죠. 주로 남자에 의해 금발의 여성이 살해당하는 할리우드 공포물과는 아주 딴판입니다. 왜 그럴까. 엉뚱하게도 이 책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춘향’을 연구하면서였습니다.

‘열녀의 교훈’이 『춘향전』의 표면적 주제이긴 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열녀의 화신’으로서의 춘향은 식민지와 근대화의 산물이랄 수 있습니다. ‘자유 연애’에 미쳐 날뛰는 허영 많은 근대 여성을 꾸짖고, 근대국가 수립에 필요한 현모양처를 길러내기 위해 하나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욕망을 주장했던 원본의 춘향 이미지는 열녀로 재조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식민시대의 민족주의와 가부장주의가 춘향 혹은 여성을 공적으로 전유하는 데 애썼던 반면, 우리 영화사에 등장하는 여자귀신들은 그 전유 과정에서 억압된 춘향의 또 다른 ‘반쪽’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은 거죠.”

한국 공포영화의 단골 주인공인 ‘여귀’는 실은 꽤 오랜 문화적 기원과 사회적 맥락을 지니고 있다.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은 죽어서 조상신으로 봉제사를 받았고(현모양처의 역할을 충실히 했던 여성도 마찬가지), 죽은 남편을 뒤따르거나 시부모를 극진히 모신 여자는 열녀문을 세워 추앙했다. 하지만 남성 가부장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던 여성들, 이를테면 시집을 가지 못했거나 순결을 지키지 못했던 여성 혹은 자식을 낳지 못했던 여성은 살아서 핍박받다가 죽어서는 원귀가 되었다.

우리나라 구전(口傳)에 등장하는 여귀는 성리학적 가부장 질서로부터 벗어난 비정상 여성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나타내주는 한편, 자신들이 억압했던 타자(여성)를 위무하고 애도할 필요에서 부름 받은 존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자신의 품에 손자손녀를 껴안고 한 많은 여자귀신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공포를 훈육 도구 삼아 알게 모르게 가부장 규범을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포영화는 신파와 멜로드라마의 소재인 처첩갈등과 고부갈등을 영화 속의 원한을 배태하는 주된 갈등으로 흡수하면서 자기 장르를 완성해 갔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의 공포영화는 한(恨) 많은 여성의 인생유전을 다루는 장르이기도 했던 거죠. 그래서 1967년 개봉되어 공포영화 붐을 일으켰던 ‘월하의 공동묘지’(권철휘)의 선전 문구도 ‘여성 팬 가슴에 애처롭게 무늬질/눈물의 영화 공포의 영화’라는 식이었죠.

공포영화 중에는 공포스럽지만 희극적이기도 해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하는 선량한(good) 공포영화와, ‘링’(나카타 히데오)처럼 영화를 보고 난 후 밤에 다시 생각하면 정말 무서워지는 악질의(bad) 공포영화가 있습니다. 슬래셔나 하드고어 영화들이 시각적 쾌감과 사도마조히즘(새도매저키즘)적 자극을 제공하긴 하지만, 이런 것보다는 ‘로즈메리의 아기’(로만 폴란스키)처럼 가족과 친구·이웃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가 진정으로 무서운, 악질의 공포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구온난화와 이상기온으로 매년 더 무덥고 긴 여름이 경신되고 있는 우리나라 사정을 보건대 납량 장르로서의 공포영화는 더욱 사랑받으며 번성하지 않을까? 나는 이 질문이 자못 공포스러운 질문이라고 여기지만, 지은이는 썰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장 작가’란 줄임말로 불리는 장정일씨는 시인·소설가·희곡작가·책 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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