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소설' 새장르 국내 본격개척신세대작가 송경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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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신세대 작가 송경아(25)가 「환상소설」이라는 새 장르를 본격 도입하고 있다.
연세대 전산과학과를 졸업한 송씨는 대학 4학년 때부터 PC통신 하이텔의 『이야기 나라』동우회 작가로 활약해오다 지난해 첫창작집『성교가 두 인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학적 고찰중 사례연구 부분 인용』을 냈다.
이번에 민음사에서 낸 두번째 작품집『책』과 계간『세계의 문학』봄호에 실린 단편 『엘리베이터』는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환상소설 장르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고 있다.
환상소설이란 환상속의 가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를 가진 소설을 말하며 소설속 시공간이「지금,여기」라는 준거점을 갖지 않은 채 현실로 묘사되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집속의 단편 『책』은 죽은 어머니가 책으로 변해 서가에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는데서 시작된다.
『어머니는 죽은 후 제지공장으로 들어갔다가 인쇄소에 들러 다시 내 방에 와 있었다.그 책은 갈수록 점점 두꺼워졌다.시간이흐를수록 어머니의 고백은 점점 더 깊어졌다.어머니는 죽은 후에자신을 좀더 깊숙이 되돌아볼 시간을 얻게 된 것 같았다.』 그책,즉 어머니를 읽으면서 주인공은 자신이 어머니의 혼외정사로 태어난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에게도 읽히기를 원치않는 책,해독되기를 거부하는 코드라는 인식에 도달하고 자신을 숨기고 변조하는 전략으로 글쓰기 를 선택한다.『위조본,복사본,파본,앞의 반은 똑같고 뒤의 반이 틀린 두 개의 책,단어하나가 틀린 책,수많은 책을 쓸거야.그래서 어떤게 진짜나-책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거야.』『그래서 나…나는 글을 쓴다.한글자 한글자 어머니의 삶,나 의 삶을 변형한다.영원의 기록에 대항해 의미없는 기록을 만들고 변조한다.모든 순간이 영원에 대한 권리가 있듯이 모든 삶은 사라질 권리가 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시간이 늦춰지고 정지하는 상황속에서 스토리가진행된다.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동안 정사를 벌이고,동화를 읽어주고,술을 마시던 승객들은 추락후 시체가 돼 일어나 욕망의 계단을 타고 다시 올라간다.시간은 그들이 다시 욕망의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멈춰 기다리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야 할 길은 멀고도 멀다.그 사이에는 하루만큼의 사건도,일생만큼의 사건도 일어날 수 있다.엘리베이터는세상처럼 넓고 좁다.그 안은 분리된 공간이고 그 분리된 공간 안에서 시간은 유리된 채 흘러가고 있다.그렇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세상에서 일어날 만한 모든 일들이』라는것이 그 상황의 핵심이다.
이같은 송경아의 작품들은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맥을 이어 서구에서 유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소설 계보를 그대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국내작가들의「환상적」소설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평론가 최성실은 송경아의 글쓰기에 대해『신세대,그리고컴퓨터 세대의 인식과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해설했다.현실 자체를 가상공간으로 보는 점,현재의 입지점을 잊어버리고미래에 몰입해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컴퓨터세대적이며 또한 세상은 불완전하고 우연하며 불확실한 미로와 같다는 인식을 깐다는 점에서 신세대적이라는 것이 그의 평이다.
신세대 작가들에게 글쓰기는 처절하게 경험한 삶의 농밀함을 언어로 풀어나가는 행위가 아니라 경험과 다양한 이미지의 경계선에서 세상을 읽어나가는 행위다.이들에게 소설이란 있음직한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주는 가 면이고 거짓말이며 언어로 구축하는 구축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면 송경아가 택한 환상소설이란 장르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그의 소설작법으로 주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송경아 자신은『카프카의 소설을 보면 작가 자신이 그 환상의 세계를 실재라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면서『나 역시 내 소설을 실재라고 믿으며 그렇게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보르헤스와 코진스키 등을 가장 좋아한다』면서『체험보다 책에서 소설을 쓸 재료와 발상을 많이 얻는다』고 밝히고 있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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