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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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길례.
거무스레한 살결과 빛나는 검은 눈.넘치는 재능과 풍요한 감성을 지닌 터질 듯 매력적인 여자.
잠시 환상처럼 나타나 아버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금을 긋고 떠나가버린 여자.
그녀의 그림자가 아직까지 드리워져 있는 것인가.
『연옥씨 고모님의 시댁 조카뻘이 된다고 들었습니다.친구겸 인척이 되는 셈이지요.』 부유한 집안이라 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자신 있는 말투다.
『아마 지금쯤 저쪽 커피숍에 와있을 겁니다.』 시동생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호텔 안에는 또 하나의 커피숍이 있었다.
아까부터 들뜬 듯이 보인 것은 그녀를 아리영에게 자랑하기 위해서였던가.
『내가 왜 그 사람을 만나야 하지요? 애소 이야기라도 하랍니까?』 아리영답지 않은 심술에 그는 의외로운 듯 입을 다물었다. 『형님과의 관계도 끝났고,이제는 서방님께 이래라 저래라 할처지도 아니고 자격도 없어요.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가지 있어요.내 집에서 서방님이 상관한 여성이 지금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에요.그러니 내가 참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서 방님도 누구하고든 결혼이건 약혼이건 하기 전에 그 여성과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리라는 것이지요.정여사님이라도 혹시 알게 되면 온당치 않을 것 아니겠어요?』 『협박하시는 겁니까?』 술기인지 노기(怒氣)인지 그의 이마가 불그레했다.
『협박으로 들렸다면 서방님도 그 일을 「약점」으로 인정하시는것 같네요.』 아리영은 탁자 위에 놓인 계산서를 손에 쥐고 일어섰다.더 이상 이야기 나눌 필요가 없어 보였다.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덩달아 일어난 시동생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정말 「고개 젓고 싶은」심정이었다.이렇게 치사한 청년인 줄은 미처 몰랐다.정여사 딸과 성혼(成婚)이 되지 않길잘했지 큰 덤터기를 쓸 뻔하지 않았는가.
그나저나 애소의 일이 야단이다.호텔의 긴 복도를 걸으며 자신에게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애소의 방을 꾸며주며 아리영은 은밀히 덫을 놓았다.덫에 걸려들었으면한 사람은 걸리지 않았고 엉뚱한 이가 걸려 속을 썩이고있다.제 꾀에 넘어간다더니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소린가.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쓰러졌다.
앞일이 막막했다.애소 일만이 아니라 아리영 자신의 일도 그랬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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