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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지리기행>17.충북 옥천군 군서면 서성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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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옛 시절이 그리운 사람들은 서성골에서 그 원을 풀 수 있으리라.그곳엔 옛 내음이 남아있는 까닭이다.시인 이갑수의 『이제부터』라는 시에서의 표현처럼 「되돌아보면 지나간 것들은/모두 어디론가 숨었다」.하지만 아직 머리카락까지 숨기지 못한 마을도 남아있을 것이니 우리는 그런 곳에서 향수를 맛볼 수 있다.
대도시 출신인 사람들에게도 향수는 있다.태어나고 자라난 골목길에 대한 그리움이 직접적인 향수라면,조그마한 둔덕에 기대듯 자리잡고 앞으로 들판을 끼어 저녁밥 짓는 연기를 피워올리는 농촌 풍경은 원초적 향수를 대변하는 셈이다.옥천엔 아직도 그런 마을이 있어 우리의 마음을 적셔주고 있다.
옥천읍에서 군서면사양리 서성골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나는 함박눈을 만났다.이미 3년째 계속되고 있는 가뭄 끝이라 이 고장에서도 눈은 기쁨일 수밖에 없다.들판 길 사이사이 자리잡은 마을공터엔 어디라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나와 서성거 리는 모습이 보인다.눈덮인 산야는 그곳이 어디든 또 다른 향수를 대변한다.
타작을 마친 빈 볏단 쌓인 논에선 강아지와 개가 미친 듯 뒹구는데 이 또한 가슴 적시는 향수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그리고 마음을 씻어내는 슬픔이기도 하다 .아마도 되찾을 수 없는그리움이 주는 슬픔일 것이다.
군서초등학교 아래 은행교를 지나 서성골로 들어가는 마을 진입로는 전형적인 명당구(明堂口)형태다.이리 비틀 저리 비틀 휘어져 감도는 길목엔 호기심이 도사리고 있다.이「꼴짜구니」(골짜기의 이 마을 사투리)를 돌아서면 옥녀가 나타나지 않을까,저 꼴짜구니를 감아돌면 만복이 할아버지와 맞부딪치는 것은 아닐까.이런 저런 생각이 상상력을 부추기고,그래서 명당구의 모습을 지닌마을 진입로는 걷기에 지겹지 않다.
이어 펼쳐지는 계곡 안의 아담한 들판,그곳이 바로 명당판인 서성골이다.처음 찾아든 길갓집 할머니는 이 눈발 속에서도 낮잠에 빠져 있던 모양이다.잠바 차림이긴 하지만 먹물 든 사람 테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내 행색을 보곤 금방 김선복 (金善福.40)씨 집을 가리키며 그리 가 보란다.아,이 지겨운 먹물의 냄새여. 바로 이 김선복씨 집이 오늘 행장의 종착지가 되는 셈이지만,놀랍게도 이곳에선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자못 시끄럽게 들린다.지금 준산간지대에 위치한 소규모 농촌치고 사람 사는 흔적이 진하게 풍기는 곳은 극히 드물다.그러니 아이들이 있 다는 자체가 놀라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랑에 자리를 잡는데 할아버지 한분이 들어선다.선복씨의 아버지 되는 김낙중(金洛中.78)노인.그 뒤에 할머니가 서 계시고 뒤로는 꼬마 셋이 치마꼬리를 잡고 늘어서 있다.부엌일 듯한 곳에선 설 거지 소리가 들린다.아이들의 어머니일 것이 분명하다.바로 살아있는 대가족제도의현장에 들어선 셈이다.
할아버지와 그의 아들,모두 마을의 산천을 닮아 수더분하기 그지없다.들려주는 얘기 역시 그저 담담한 숭늉 맛이다.뭐랄까,산천도 사람들도 있는 듯 없는 듯 스스로 거기에 있음(自然)그대로다.이 마을엔 볼 것도,배출한 인물도 없고,특산 물도 없다는두 분의 말씀은 내게 꾸지람처럼 들린다.난 지금까지 비상함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비상함은 정상이 아니다.그것은 삶의 현장도 아니었다.다만 흥미있는 얘깃거리일 뿐이었다.오늘 나는 천년을 뿌리내려 살아온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옥천군청의 친절한 직원이 내준 자료엔 이 마을에 대해「마을 부근에 신선이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의 명당(仙人讀書形)이 있어글 읽는 소리가 늘 끊이지 않았으므로 서성동(書聲洞,지금은 西城洞으로 표기함)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나와 있 다.내가 본 주변 산세는 신선이라기보다 순박한 시골 할아버지를 닮아 있었지만 그러면 어떤가.바로 그 할아버지가 신선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이댁 할아버지는 어릴 때 초당에서 훈장으로부터 글을 배우던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데,혹 그 훈장 어른이 신선은 아니었는지.
할아버지는 신선봉보다 그 제자에 해당된다는 제자3봉에 더 깊은 애착을 갖고 있는 듯했다.마을 앞에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셋있는데 그것이 바로 제자3봉이다.봉우리 기슭엔 산소들이 들어섰고 그 아래론 포도밭이,또 그 아래로는 논이,그 리고 논 귀퉁이엔 냇물이 흐르고 있다.선복씨가 어릴 때 고기 잡으며 놀던 냇물은 그러나 이제 그 때의 그 냇물이 아니다.농약 오염과 아래쪽으로 쌓은 보(洑)때문에 고기가 올라오지 못해 사실상 죽은내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이 또한 비극이지만 아버지와 아들의생각은 차이가 난다.
할아버지의 남은 바람은 그 옛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춘 계백(階伯)의 백제군과 최후 결전을 벌이기 위해 넘어갔다던 오동리 숯고개(炭峴)쪽으로 도로가 뚫려 대전 나들이가 쉬워졌으면 하는 것인데,아들은 그에 반대였다.
***길나면 都市타락 올까 걱정 『길이 나면 들어올 것은 도회지의 타락이요,나갈 것은 순진한 농사꾼들이니 무슨 낙으로 그를 바라리오』하는 것이다.군대생활을 빼곤 한번도 외지에 나간 적이 없다는 선복씨가 무슨 뚜렷한 문명비판적 사고가 있어 이런말을 한 것은 아니 다.그는 이런 삶의 인간미에 애착을 나타냈을 뿐이고,그의 아버지는 어려서 겪은 찢어지는 가난을 잊지 못해 개발 지향적 의도를 나타낸 것이리라.공동체의 와해로 인해 삶의 황폐화를 지겹도록 겪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순응적 태도를 바라고 있으면서도 개발이 가져다 준 가능성의 달콤함을 잊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지금 이 시대,우리들이 항용 하고있는 고민의반영일 듯하다.
마을은 범상하다.하지만 그를 둘러싼 산야는 잘 살펴보면 비범한 바가 없지 않다.아마도 범상 속에 감춰진 비범이라야 보물이되기에 그런 지도 모른다.동구(洞口)에 흐르는 서화천변 서화팔명당(西華八明堂)이란 것이 바로 그 예다.이름하 여 사정리 행정마을과 동평리 평곡마을 사이의 작약미발형(芍藥未發形),은행리상은마을 위쪽의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앞에서 살펴본 서성골의선인독서형,사양리 논골 닭재에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하동리 마을 뒷산의 옥녀탄금형(玉女 彈琴形),오동리 무중골 앞산의 오동계월형(梧桐桂月形),월전리 군전마을의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월전리 용복 뒷산의 적선행주형(積船行走形).하지만 욕심낼 필요는 없다.예컨대 작약미발형 천하대지는 토정(土亭)이지함(李之함)이 직접 자 신의 산소자리로 잡아놓은 곳이지만 그런 당대 최고수도 결국 이곳을 차지하지는 못했으니까.
(전 서울대교수.풍수지리연구가) 최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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