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눈빛만으로 천 길 깊이 연기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SUNDAY

“나이가 들수록 매력적으로 보이는 까닭이 뭐냐”는 물음에, 이만한 답이 또 있을까. “남자의 매력적인 면은 인생의 경험이 쌓여 있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위썬(吳宇森) 감독이 나보다 더 매력적이다.” 경험에서 깨우친 것을 속 깊이 쟁여 두는 남자. 무르익은 여유가 눈빛으로 우러날 때, 외려 타인의 깊이를 추켜줄 수 있는 남자. 그것이 연기라면, 이토록 완벽한 연기는 배우로서 대단한 재능이 아닐 수 없으리.

아시아에서 최다 제작비(800억원)를 들인 영화 ‘적벽대전’이 23일 기자 시사회에서 베일을 벗었다. 한국을 포함해 중화권에서 가장 사랑받는 고전소설 『삼국지연의』의 백미인 적벽대전을 소재로 한 데다 한·중·일·대만의 자본과 할리우드의 기술력이 합세해 일찌감치 기대를 모았다. 4년에 걸친 제작 분량을 한 번에 담긴 무리였는지, 7월에 1편 ‘거대한 전쟁의 시작’이 개봉되고 2편은 올 12월에 선보인다.

영화 ‘트로이’(2004)를 보고 ‘적벽대전’의 영화화 결심을 굳혔다는 우위썬 감독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적벽대전’은 동양판 ‘트로이’다. 서양의 고전 일리아드를 바탕으로 한 ‘트로이’가 미녀 헬렌을 탐하는 영웅의 맞대결을 부각시킨 것과 비슷하게, ‘적벽대전’ 또한 삼국의 패권 다툼 아래 선남선녀의 애욕과 자존심을 도화선으로 깔았다.

전투 자체가 유비·관우·장비가 아닌 주유와 제갈량이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영화에선 이 점이 훨씬 강조된다. 우위썬 감독은 특히 량차오웨이(梁朝偉)가 연기한 주유를 가리켜 “문무를 겸비했고, 음악을 잘 알고, 배포가 넓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형”이라며 애착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스크린에 투사된 주유는 용맹과 지략에다 예술에 대한 조예와 섹시미까지 갖춘 완벽남으로 거듭났다. 출정 전날 아내 소교(린즈링·林志玲)와의 정사신은 량차오웨이의 전작 ‘색.계’를 연상시키는 농염함을 뿜었고, 제갈량(진청우·金城武)과 거문고를 타며 동맹을 교유하는 대목은 예술가적 고독미를 자아냈다.

영화 막판 전장에 뛰어들어 온몸으로 수하들을 구해내는 대목에선 호걸의 남성미가 우러난다. 소설 원작에서 팽팽한 신경전으로 맞서던 제갈량이 영화에선 한없는 신뢰의 눈빛으로 주유를 바라보기까지 하니, 라이벌은커녕 동성애적 교감이 느껴질 정도다.

“촬영을 끝내고 보니 주유는 지금까지 제가 연기한 인물 중 가장 결점 없는 남자더라”고 량차오웨이는 내한 인터뷰(6월 26일)에서 밝혔다. 바꿔 말하면 그간 연기한 인물들은 결점이 도드라지는 이들이었단 뜻이다. 그랬다.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진사(‘비정성시’), 밑바닥 인생에서 빠져나오지도 적응하지도 못하는 포주(‘씨클로’), 연인을 잃고 비누에게 말을 거는 도시의 소시민(‘중경삼림’), 폭력조직에 스파이로 잠입해 정체성에 괴로워하는 경찰(‘무간도’) 등 어쩔 수 없는, 어찌할 바 모르는 인간이 그의 것이었다.

천형(天刑)처럼 감내하는 슬픔은, 기나긴 대사 대신 눈빛으로 표현됐다. ‘해피 투게더’나 ‘화양연화’ 같은 출연작이 결코 제목대로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서글픈 눈빛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지금은 세계의 거장들이 ‘가장 함께 일하고 싶은 배우’로 꼽지만, 홍콩 TVB 배우스쿨을 통해 데뷔하던 초창기엔 그저 그런 아이돌스타에 불과했다. ‘녹정기’ ‘대운하’ ‘의천도룡기’ 등 무협시리즈에서 코믹하거나 우유부단한 캐릭터로 기억하는 노장 팬도 많다.

전환점이 된 영화가 1986년 관금붕 감독의 ‘지하정’. 이때 보여준 일상적인 감성의 연기에 반한 대만의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비정성시’로 끌어들였고, 이후 왕가위 감독과 만나 그의 페르소나로 일컬어지며 영화 출연을 이어간 것은 알려진 바다. 가수와 배우를 병행하는 홍콩 엔터테인먼트계의 관행대로 음반을 낸 적도 있지만, 노래는 일찍 접고 연기에만 진력했다. ‘적벽대전’의 거문고 장면에 관해서도 “원래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어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어느 한 여자에게 독점될 것 같지 않은 남자지만, 내한 인터뷰를 통해 오랜 연인 류자링(劉嘉玲)과의 연내 결혼을 시사했다. 마흔여섯 살. 배우로서, 남자로서, 그의 ‘화양연화’(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현재진행형이다.

강혜란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