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의펜화기행] 북쪽 문, 그 험난한 세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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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의 창의문, 종이에 먹물, 36X50cm, 2008

요즈음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옛 건축문화재 사진엽서를 구하는 재미에 흠뻑 빠졌습니다. 몇천원에서 몇십만원까지 호가가 이루어지는데 희귀한 엽서를 낙찰 받았을 때에는 없어진 문화재를 되찾은 것처럼 흥분됩니다.

얼마 전 창의문(彰義門) 엽서를 구해 그동안 자료 부족으로 그리지 못했던 복원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서울 성곽의 4대문과 4소문 모두를 펜화에 담은 셈입니다.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이란 아름다운 별칭처럼 주변 풍치가 장안 제일이었습니다. 경복궁과 창덕궁이 가까워 나들이 장소로도 최고였지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이 자랑하던 자하문 밖 별장을 대원군이 간계로 빼앗은 것도 주변 풍광 때문일 것입니다.

창의문을 지나는 길은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만 반대로 서울을 공격하는 반란군의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광해군 14년(1623) 3월 12일 반정군이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창덕궁으로 난입해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를 왕으로 세웁니다. 창의문에는 본래 문루가 없었으나 인조반정을 기리는 뜻으로 영조 17년(1741)에 문루를 세우고 반정공신의 명단을 붙였습니다.

1950년 6·25전쟁 때 북한군이 넘어왔고, 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난입합니다. 물론 성문 옆으로 난 도로였습니다. 실패하고 달아나다 잡힌 김신조는 “나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라고 해서 온 국민을 놀라게 했습니다.

창의문은 4소문 중 유일하게 제자리에 남아 있는 건물인데 바로 앞으로 높은 도로가 나는 바람에 옛 정취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창의문에서 숙정문에 이르는 길은 새로 개방된 문화산책 길로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등산을 겸해 찾아보시면 몸에도 좋고 머리에도 좋습니다.

김영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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