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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부산, 가고 싶지요. 하지만 난 지금 한화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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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球都) 부산 야구팬들의 공식 응원가가 된 ‘부산갈매기’의 노랫말이다. 하지만 정작 부산 야구 열풍의 주역이었던 ‘원조 갈매기’ 최동원의 흔적은 지금 부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바로 그다.

골 깊어가는 이마의 주름, 영락없는 갈매기 주름이다.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1.국보급 투수 최동원

6월 24일 김해시 상동 롯데 부산구장에서는 한화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최동원 한화 2군 감독은 그곳에서 자신이 몸담았던 롯데를 상대로 경기를 지휘하고 있었다. 편견이었을까. 그의 첫인상은 ‘약해졌다’ 혹은 ‘순치됐다’는 느낌이었다.

Q.고교 시절 4연속 완투 우승, 17이닝 노히트 노런, 연세대 23연승, 대륙간컵 야구대회 MVP, 1984년 정규 시즌 27승, 한국시리즈 5회 연속 등판 우승 등 전무후무한 기록들을 세웠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선수 생명에는 거의 자해 행위에 가까운데…. 승부욕 때문이었나요?

“그런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야구는 팀 운동입니다. 승리가 보이는데 ‘내가 힘들어서…’라고 빠진다는 게 통할 수 없었어요. 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만 해도 6차전까지 3-3으로 간 것도 우리 팀으로서는 능력 이상이었어요. 거기서 욕심이 안 나겠어요? 당시 강병철 감독님이 농반 진반으로 ‘네가 1, 3, 5, 7차전을 맡아라’고 하셨는데, 실제로는 5게임을 나섰죠. 고교 시절부터 늘 그런 상황의 연속이었어요.”

Q.프로 시절은 대가가 주어지는 일이니 그렇다 치고, 아마 시절의 혹사 때문에 너무 빨리 지고 말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스스로도 프로 진출 때 이미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맞는 말이지만, 이제는 아쉬운 것도 원망도 없어요. 흘러간 과거일 뿐이지요. 지도자는 성적 지상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면 자리 보전이 안 되거든요.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논리가 있죠. 저는 그 시대의 선수였고요. 누구나 인생에 후회는 있겠지만 빨리 털어야죠. 그래야 앞으로 가죠.”

Q.선동열과 세기의 대결은 결국 1승1무1패로 끝나고 말았죠. 후배 선동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좋은 선수죠. 나는 타석에 서 본 일이 없으니 선동열의 볼이 홈 플레이트를 파고들 때 타자들이 느끼는 감정을 알지는 못하죠. 때로는 내 공도 어땠을까 궁금할 때가 있어요. 그는 제대로 된 슬라이더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타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볼이 무거워 공략이 쉽지 않았다더군요.”

Q.선수 시절 팀과 불화가 심했다던데요?.

“선수협 사건이 결정적이었을 것 같아요. 롯데 시절에 어느 날 70대 할아버지가 손자를 데리고 와서 사인해 달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당신도 선수였다고 하시더군요. 그때 할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면서 우리 선수들도 노후를 준비할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만 해도 밥값도 안 되는 연봉을 받는 선수가 많았어요. 그들도 프로가 뿌리 내리는 데 공헌한 사람들 아닙니까. 당시에 내가 잘나가던 것도 결국은 다른 선수들의 공이다 싶더군요. 그래서 선수협을 만드는 데 앞장섰어요.”

2.타고난 반골 기질

Q.본인의 반골 기질이나 팀에 대한 불만이 작용한 탓은 아닌가요?

“반골 기질…. 제게 그런 게 있죠. 구단에 대한 불만, 그것도 있었겠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동료 의식이었어요. 잘나가는 선수가 주도하지 않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지금도 그것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Q.한·미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로 나서 맞았던 코스에 다시 같은 공을 던진다든지, 아니면 일부러 한가운데 직구로 승부해 홈런을 맞는다든지 하는 고집도 그런 점과 상통하지 않나요?

“그런 비난도 들었어요. 하지만 그건 객기가 아닌 준비된 마음가짐이지요. ‘나는 이길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정면 승부를 하게 만들었죠. 그런 큰 경기는 나를 평가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왜 비겁하게 피해 갑니까?”

Q.일부 폄훼하는 사람들은 튀고 싶어 일부러 그랬다고들 하는데요?

“그런 사람들, 자기가 같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내가 당하지 않으려면 남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해요. 저는 내내 말에 시달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입니다.”(이 말을 하며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감정이 격앙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가슴에 맺힌 것들이 커 보였다.)

3. 놓쳐 버린 기회들

Q.81년 캐나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이 무산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었는데요.

“연봉 욕심? 아니었어요. 연봉 61만 달러에 계약이 되었었죠. 하지만 병역 문제가 걸렸어요. 당시 차범근 선수가 공군에서 병역을 마치고 독일로 갔죠. 저도 마찬가지로 병역이 문제가 된 거죠. 81년도에 캐나다 총리가 왔을 때,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교민들의 사기를 위해 전향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시를 했다더군요. 그때 청와대에서 전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죠 하지만 결국 걸림돌이 되더군요.”

Q.아마 시절 일본 롯데 가네다 감독의 양자로 입적해 일본 프로로 진출하려던 것도 같은 이유였나요? 그때는 귀화 아니냐는 식으로 여론이 안 좋았었는데요.

“그때는 아니었어요. 당시 일본에는 외국인 선수 제한이 있었고, 롯데에는 외국인 티오가 꽉 차 있었어요. 그래서 입적하자는 제안이 오간 거죠. 하지만 조부가 완강하셨죠. 아무리 서류상이지만 일본 사람의 양자가 말이 되느냐고요. 고3 때인데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어른들 사이에서만 이야기가 오간 거죠.”

Q.다시 프로 시절로 돌아가 보죠. 연봉 문제로 구단과 매년 충돌했었죠. 연봉은 국내 최고였는데, 몸값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집착할 이유가 있었나요?

“그건 구단의 언론 플레이가 많이 작용한 겁니다. 선수는 개인입니다. 구단은 힘이 있고요. 그 시절은 말할 것도 없죠. 아무리 스타라도 구단을 이길 수는 없어요. 언론도 마찬가지죠. 구단 이야기를 듣겠어요? 선수 편을 들겠어요? 프로 선수가 구단과 몸값을 협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구단에서 처음엔 저하고 협상하다 아버지가 오셔서 조율해 달라고 부탁하고서는 나중에는 아버지가 개입해 협상이 깨졌다고 흘리는 거죠. 그럼 언론은 그렇게 써요.” (그는 당시 롯데 구단에 여전히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과거의 최동원이 아니었다. 지난날 시속 150㎞의 광속구처럼 쏟아 내던 직설적인 말들이 이제는 완곡한 표현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4.아버지의 이름으로

Q.최 감독님을 이야기하려면 부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죠. 부친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6·25 때 다리를 다치셨어요. 그래서 의족을 하고 다니셨죠. 그런데 야구선수 뒷바라지란 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밤에 집에 돌아오셔서 의족을 벗으면 다리의 절단된 부분이 벌겋게 퉁퉁 부어 있었죠. 그 다리를 뜨거운 물로 마사지하면서 혼자 우셨어요. 그걸 보고 자란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졌겠습니까?”

Q.하지만 밖에서는 부친에 대해 말이 많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떠돌죠. 최동원은 아버지가 망쳤다고요. 하지만 아버지가 마음대로 하신 일은 하나도 없어요. 아버지는 저하고 집에서 먼저 상의하시고 저하고 의견이 일치된 일만 밖에서 말씀하셨죠. 그러면서도 말씀하셨죠. ‘너는 당사자다. 당사자가 욕을 먹으면 치명적이다. 욕먹을 일은 모두 내가 맡겠다. 너는 내 뒤에 숨어라’. 그걸 두고 세상 사람들은 아버지가 마음대로 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철두철미하게 제 뜻을 존중하신 분입니다. 아버지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고 싶어요. 아들을 위해 살다 가셨는데, 정작 아들은 아직도 그걸 못해 드리고 있습니다.”

Q.부친께서 조기 은퇴를 제안한 것으로 압니다. 선수협 파동이 원인이었나요?

“저는 적절한 은퇴였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부족한 부분을 보이지 말고 밀려 나오지 말라’고 하셨죠. 그리고 아버지는 제가 야구선수 이상의 ‘무엇’이 되기를 바라셨어요. 단순히 야구만 하는 ‘쟁이’가 되지 말라고 하셨죠. 제 생각도 그랬고요. 삼성의 김시진 선수와 제가 선수협 사건으로 맞트레이드됐는데, 정말 충격적이었죠. 나의 전부가 무너진 거죠. 롯데가 아닌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선수 생활을 중단할 이유는 아니었죠. 구단은 구단이고 선수는 선수니까요. 트레이드는 감정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 년을 더 뛰었어요. 당시 김성근 감독께서 일 년 더 뛰라고 하셨는데, 물러날 때라고 생각했죠.”

Q.은퇴 후 그린 첫 번째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공부였어요. 미국에 갔죠. 6~7년 계획으로 갔는데 SBS에서 해설위원 제안이 왔어요. 고민을 많이 했죠. 결국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죠. 귀국한 뒤 야구 해설을 맡았어요.”

Q.부친이 그린 아들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였을까요? 지방의회 선거에 출마했었는데, 그것도 부산에서 민주당 후보로요. 당선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선수협 등을 거치면서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어요. 그래서 출마했습니다. 당선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민자당에서도 제안이 있었지만 민주당을 택했어요. 그것도 일종의 반골 기질이었는지 모르죠. 하지만 그래야 진정성을 이해받을 것 같았어요. 유세장 가서 야구선수가 아닌 인간 최동원으로 사람들에게 주장할 수 있었어요. 공개적으로 ‘이런 건 아니다’ 하고 말하고 싶은 게 있었던 거죠. 그 점에서 아버지가 그린 꿈은 늘 제 꿈과 같은 것이었어요.” (최동원은 그전부터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파업 중이던 부산일보 노조에 성금을 전달한다거나, 초대 선수협회장을 맡은 일 등은 충분히 정치를 위한 사전 포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당시 최동원의 선거 구호는 ‘민주 자치의 선발투수,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였다.)

5.이루지 못한 꿈

Q.그 말하고 싶었던 것, 그게 뭘까요?

“제 가슴속에는 아직도 뜨거운 불덩어리가 있어요. 그건 아버지와 제가 꾼 꿈입니다. 그간은 불덩어리를 토해 내는 과정이었지요.”(그는 불덩어리의 실체에 대해서는 애써 말을 피했다.)

Q.안티구아 의류사업도 같은 맥락인가요? 부친과 최 감독이 함께 이루려던 꿈에 도달하는 과정 같은 것 말입니다.

“맞아요. 나는 내가 부딪히고 경험하려 했습니다. 안티구아도 미국까지 가서 어렵게 국내 판권을 따고 직접 뛰어다녔죠. 힘든 일이었어요. 그런데 광고가 나가고 난리가 났죠. 전화가 불통이 되고, 직원들이 도망을 가고, 지금 생각하면 평범한 광고인데 당시로서는 빨랐던 거죠.” (당시 안티구아 광고는 요즘 베네통의 광고처럼 백인 여자와 흑인 남자, 그리고 백인 아이의 뒷모습을 누드로 처리한 것이었다. 그 여파는 엄청났다. 광고 모델이었던 골프선수 페인 스튜어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불운까지 겹치면서 그의 사업은 피어 보지도 못했다. 그 점에서 보면 최동원은 늘 반 발이 아닌 한 발 앞서감으로써 스스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최동원의 ‘외도’는 계속돼 방송에도 나가고, 시트콤에도 출연했다. 그는 이것을 부친의 유지대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는 과정으로 여겼다고 했다.)

Q.결혼마저 최동원다웠다고들 하는데….

“선수협 파동 이후 미국으로 갈 때였지요. 이종 사촌 집에서 한 번 만났는데, 두어 번 보고 공항에서 집에 전화를 걸어 느낌이 좋다고 했더니 일주일 뒤에 함 들어간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일곱 번째 만난 게 결혼식장에서였습니다. 그때도 말이 많았는데…. 보세요, 지금 잘살고 있잖아요. 선구안이 좋았던 거죠.”

Q.아들은 야구를 안 시킨다고 하던데….

“아니, 지금 야구를 하고 있어요. 큰 재능은 없어 보이는데, 자기가 좋다고 하더군요. 선수의 길이 힘들어 정말 시키고 싶지 않아 집에서는 야구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죠. 그런데 어느 날 야구를 하고 싶다기에 이렇게 말했어요. ‘나중에 원망 마라. 후회도 마라. 나는 원한 게 아니다. 그 점은 분명히 하자’. 그랬는데도 하겠다는데 어쩌겠습니까.”

6.지도자의 길

Q.어느 야구팬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부산은 최동원을 낳았고, 최동원은 부산팬을 낳았다’. 심경이 어떻습니까? 요즘 부산의 야구 열풍을 보면….

“부산은 내 고향이고 뿌리입니다. 어머님이 계시고, 나를 만들어 준 곳이죠. 하지만 지금 제가 그 자리에 없다고 해서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Q.선동열 감독이나 김재박 감독 같이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성공한 분들을 보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나요?

“자존심 같은 것은 버린 지 오랩니다. 자리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요. 선수들은 누구나 감독이 되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본인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죠. 묵묵하게 내실을 다지고 내공을 쌓으면 기회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 점에서 저는 아직 부족하고요.” (10년 동안 야인으로 떠돌던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한화의 김인식 감독이다. 김 감독은 그에게 1군 투수코치로 조성민의 부활을 전담시켰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는 여기에 대해 이미 시기적으로 늦은 일이었다고 평했다.)

Q.무례한 질문이지만 재산은 얼마 정도 됩니까? 한때 연봉이 강남 아파트를 한 채씩 살 정도였다는데요.

“먹고살 만큼은 있어요. 재산은 많으면 많은 대로 반대급부가 있어요.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살기에 적당하면 되죠.”

Q.당시 최동원·선동열 같은 불세출이라는 별명을 붙일 만한 선수가 요즘은 잘 안 나옵니다. 이제 지도자 입장에서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아, 그건 식습관부터 차이가 있어 그렇습니다. 다들 어릴 때부터 고기나 패스트푸드 같은 것을 잘 먹고 해서 예전보다 체격 조건은 좋아요. 하지만 과연 내부의 힘이 강한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툭하면 부상이고 고장이죠. 연습 강도가 높아지면 이기지를 못해요. 조금만 무리하면 어디가 안 좋다, 어디가 아프다고 하죠. 정신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Q.마지막으로, 이제 세상에 길들여진 건가요? 아니면 아직도 마음속에 무엇인가 엄청난 포부와 음모(?)를 숨기고 있나요?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 “포부, 뭔가는 있죠. 하지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그 뭔가를 안고 살아갈 겁니다.”

최동원은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롯데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을 꼽았다.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고 했다. 그래서 고향 부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느냐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화 2군 감독이라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했다. 이제는 기다릴 줄 알고, 또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익혔다고도 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간곡히 부탁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부친 최윤식씨에 대한 세상의 오해를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한평생 아들을 위해 살다간 아버지에 대한 사부곡이 그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다. 최동원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자기를 던져 인터뷰어와 거래를 한 것일지도 몰랐다.

글=박경철 donodonsu.naver.com,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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