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환율 끌어내리기 … 정부가 시장혼란 부추긴 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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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원-달러 환율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외환당국이 외환보유액을 풀어 강하게 누를 때만 ‘반짝 효과’가 있을 뿐 당국의 개입만 사라지면 금방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곤 한다. 마치 시장이 정부의 ‘패’를 읽고 달러 내놓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 사이 애써 쌓아둔 외환보유액만 축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외환당국이 시장의 신뢰를 되찾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일단 환율 상승부터 막고 보자”=외환시장에선 당국이 5월 말 이후 여섯 번 정도 시장에 개입한 것으로 추정한다. 모두 환율을 낮추기 위해서였다. 외환시장에 쏟아 부은 외환보유액만 약 70억 달러. 당국이 환율 낮추기에 나선 것은 물가 때문이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 물가가 오르고 이는 곧 소비자물가 인상으로 이어진다. 당국의 개입은 지난달 24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국정 목표를 물가 안정에 치중해야 한다”며 물가 안정을 거듭 강조한 뒤 더 과감해졌다. 당국은 지난달 24일 시장에 10억 달러를 투입한 데 이어 지난달 27일엔 15억 달러 이상을 팔아 환율 상승을 억제하고 나섰다. 당국이 개입을 멈춘 30일 환율은 지난 주말보다 4.5원 오른 1046원을 기록했다.

◇‘패’를 읽고 있는 시장=당국의 초조함을 외면하듯 시장엔 달러 수요가 넘친다. 경상수지도 6개월 연속 적자를 내고 있다. 외국인들이 이달에만 4조7000억원 이상의 주식을 순매도했다. 원화를 달러로 바꿔 들고 나갈 시기만 재고 있다. 유가가 급등하면서 정유사들의 달러 수요도 대폭 늘었다. 환율 상승 요인이 가득하기 때문에 당국이 달러를 풀기 무섭게 동이 나는 것이다. 당국이 고환율(원화 약세) 정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는 시각도 한몫한다. 외환시장 관계자는 “물가가 안정되면 곧 성장 기조로 돌아가 환율을 끌어올리려 들 테니 미리 달러를 사두자는 투기성 수요도 만만찮다”고 말했다.

◇정부 신뢰부터 찾아라=전문가들도 당국의 환율 방어에 수긍할 만한 대목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박해식 금융연구원 연구실장은 “금리 인상 카드를 쓰기 어려운 상황에서 외환보유액을 일부 써서라도 수입 물가 상승을 막으려는 정책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 개입이 언제까지나 정당화될 수는 없다. 물가 관리를 위해 외환보유액을 마냥 쏟아 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는 인위적으로 환율 상승을 억제했다가 10년 전 외환위기를 맞은 경험이 있다.

게다가 당국 개입의 ‘약발’이 떨어졌다는 점도 큰 문제다. 시장은 “환율이 물가 안정 쪽으로 움직여주길 바란다”는 당국의 시그널을 무시하고 있다.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는 이에 대해 “당국이 시장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출범 직후부터 조급하게 환율을 끌어올리려고 무리수를 둔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강 교수는 “외환당국이 시장의 펀더멘털과 반대로 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며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면서 “물가 안정도 중요하지만 국제수지도 고려해 외환보유액과 환율을 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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