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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음감’ 대신 ‘절대미각’… 레스토랑 문 여는 성악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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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몸이 악기라 미각이 민감하다? 음악의 즐거움을 알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성악가들의 레스토랑이 특유의 예술적 분위기로 문화계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 모데나에 위치한 레스토랑 ‘유로파 92(Europa 92)’는 이탈리아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이다. 낮은 천장과 하얀 식탁보는 전형적인 ‘트라토리아(Trattoria)’, 즉 소박한 음식점의 모습이다. 그런데 다녀간 손님들이 화려하다. 존 본 조비, 리키 마틴, 스팅,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왕세자비 등이 이 레스토랑에 들렀다. 이 식당의 주인 때문이다. 지난해 71세로 타계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이곳을 운영하고 있었다. 모데나에서 나고 자란 파바로티는 1991년 4월에 이 식당을 열었고, 파바로티 특유의 낙천성이 배어 있는 분위기와 유명인 단골 때문에 식당은 모데나의 명소로 자리잡게 됐다.

최근 서울에도 성악가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늘어났다. ‘성악가들은 식도락을 안다’ ‘몸이 악기라 미각이 민감하다’ ‘음식의 나라인 이탈리아로 유학을 많이 다녀오기 때문이다’. 성악가들이 레스토랑을 여는 이유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성악가 레스토랑의 주인들은 “좋은 음식을 만났을 때의 기분이 노래의 즐거움과 맞닿아있다”라고 입을 모은다.

◇절박함에서 나온 요리=“배고파서 한 거죠 뭐. 생존 때문에 요리를 시작했어요.” 한남동 ‘레 뜨레 깜빠네’와 청담동 ‘비스트로 디’의 이형호(55) 대표는 독일ㆍ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6년 동안 성악을 공부했다. 레스토랑 운영자이면서 셰프도 겸하고 있는 그의 첫 작품은 ‘양배추 볶음’. “노래가 너무 좋아 음대 성악과 졸업 후 무작정 유학을 떠났죠. 비행기삯도 없어 입양아 세 명을 안고 가야 했을 정도였어요.” 가난한 시절, 냉장고에 덩그러니 있던 양배추를 썰어 볶음으로 만들어 먹던 것이 그의 첫 요리였다.

방배동 서래마을 ‘톰볼라’의 김주환(57) 대표가 기억하는 가장 훌륭한 요리도 유학 시절에 나왔다. 역시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후 이탈리아 카타니아로 떠난 그는 버섯 하나만으로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성악을 공부하는 친구들이 잔뜩 왔는데 줄 게 버섯밖에 없는 거예요. 얇게 저며 마늘ㆍ소금ㆍ식초만으로 간을 했죠.” 김 대표는 “입맛 까다롭기로 소문난 성악가 친구들이 만족하는 걸 보고 ‘절대음감’ 대신 ‘절대미각’을 발견했다”며 웃었다.

◇“문화를 옮겨온다”=이처럼 이탈리아로 유학을 많이 가는 성악 전공생들은 유학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에 오고 싶었던 마음만큼 귀국 후에는 한국에서 이탈리아를 그리워하게 돼요.” 테너 유승범(39)씨는 레스토랑 ‘소프라’를 책임지고 있다. 건국대 안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제가 부대표로 일하는 공연 기획 업체에서 외식 사업을 생각하기에 이탈리안을 권했죠. 조리사 자격증은 없지만 메뉴를 정하는 단계에서 이탈리아에서 6년간의 생활 경험으로 조언을 많이 했어요.” 그는 호화스러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아닌, 실제로 그 나라 시골에 있을 것 같은 식당을 만들고 싶었다. 4500원짜리 파스타 ‘알리오 올리오’도 그렇게 나오게 된 것.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탈리아의 문화 구석구석을 체험했다는 점이다. “밀라노에서 도시 전체에 충격을 받은 일이 있어요. 가구 박람회였던가…. 큰 행사가 있는 날이면 도시의 20~30개 레스토랑에서 칵테일 파티가 열려요. 홍보 효과와 동시에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거죠.” 서초동 예술의전당 앞 ‘라 칼라스’의 안보현(34) 대표는 “서울의 예술인 사랑방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개점 5년 째인 지금, 그는 어느 정도 그 꿈에 가까이 가 있었다. 라 칼라스는 예술의 전당에서 중요한 연주가 끝날 때마다 시끌벅적한 축제 장소가 된다. 예술인들의 편안한 약속 장소이자 단골 뒤풀이 장소이기 때문이다.

성악가 레스토랑의 대표들 대부분이 “첫 요리는 성악가 동료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람 좋아하는 성악가들은 노래만큼 음식도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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