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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60년, 새로운 변신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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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광화문이 밤마다 무법천지다. 해방구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인터넷은 물론 거리 곳곳에, 경찰차에 ‘2MB 퇴진’ 스티커가 붙어 있다. 초등학생들까지 ‘이명박 냉큼 물러나시오’란 글귀를 들고 다닌다. 역대 최다 표차로 당선돼 대통령에 취임한 지 겨우 석 달. 지금 물러나면 어쩌겠다는 건가. 평화시위를 보장하는데도 경찰차를 부수고, 전경을 대열에서 끌어내 발로 밟는다. <본지 6월 27일자 1면> 청와대로 가겠다고 한다. 대통령을 힘으로 끌어내기라도 하겠다는 기세다.

외국인의 눈에는 이게 이상하게 비치는 모양이다. 유럽의 한 외교관은 “한국의 대통령은 뽑힐 때까지는 인기가 좋다가 당선되면 곧바로 레임덕에 빠지는 악순환을 반복한다”며 그 이유를 물었다. 책임만 맡긴 뒤 일할 시간은 안 주고 몰아세우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외교정책을 자신의 입장대로 밀고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도 했다.

대통령제의 장점은 안정된 정부라고 한다. 보장된 임기 동안 일관된 정책을 밀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내각제를 채택한 유럽보다 더 변화무쌍하다. 역동적인 한국 대통령의 지지도를 그 외교관도 본국에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10%대 지지를 받는 정부는 있을 수 없다. 내각제라면 몇 번 정권이 바뀌었을 상황이다.

우리는 대책이 없다. 이 정부만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도 사사건건 여론과 부딪쳤다. 임기를 마칠 때는 사실상 식물 대통령이었다. 나라가 엉망이 돼도 책임을 안 진다. 공권력이 짓밟히고, 민심과 거꾸로 가도 임기를 채울 수 있다. 다음 선거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국민도 승복하지 않는다. 선거 때의 앙금을 그대로 안고, 일할 기회도 주지 않고 나가라고 한다. 공권력을 폭력으로 몰아세우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코웃음친다. 인권, 저항권, 직접민주주의로 오히려 미화한다. 총체적 무책임제다.

최근 광화문의 상황은 도저히 정부가 있는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그 가장 큰 책임은 이명박 정부의 무능에 있다.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 같다.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정권을 포기해도 지켜야 할 원칙이 없다. 사람이 바뀐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정권마다 대통령과 여론의 갈등은 반복돼 왔다. 도대체 왜 이럴까. 정말 민의를 잘 반영할 수 있는, 그래서 좀 더 책임있게 국정을 추진할 수 있는 체제는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고민할 때다.

취임하자마자 레임덕에 빠지는 체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정부를 5년 내내 지켜보면서도 대안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답답한 노릇이다. 대통령 선거에 모든 것을 다 걸고 싸우기 때문이다. 레임덕 현상이 이렇게 빨리 찾아오면 여소야대가 일상화할 수밖에 없다. 여야 협조도 기대하기 어렵다. 정치가 정당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체제에서는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지금처럼 선거 주기가 엇갈려서는 중간평가도 아니고, 허니문 선거도 아니다. 정부의 운명을 우연의 조합에 맡기는 꼴이다.

개헌을 먼저 꺼낸 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이 지난해 초 개헌을 주장하기 전 각종 학회가 먼저 세미나를 열며 분위기를 띄웠다. 필자도 그중 서너 곳에 토론자로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개헌 그 자체보다 정치적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성사될 가능성도 없었다. 세가 불리했던 열린우리당이야 개헌 논의로 어떻게든 선거판을 흔들고 싶었겠지만 한나라당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나라의 근본 틀을 짜는 개헌 논의가 정략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참석자들도 개헌의 필요성에는 대부분 공감했다. 다만 대선 직전의 개헌 논의에 대한 찬반만 엇갈렸을 뿐이다.

이제 달라졌다. 본지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국회의원 5명 중 4명이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했다고 한다. <6월 27일자 1면> 일부에선 경제 회복이 우선이라고 한다. 하지만 국론이 분열돼 심각한 갈등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미룰 이유가 없다. 이미 개헌안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진전돼 있다. 4년 중임제와 내각제, 부통령제는 물론 경제 조항과 통일 관련 조항까지 논의가 구체화돼 있다.

더군다나 대선과 총선이 4년 정도 남았다. 정치적 왜곡이 가장 적을 수 있는 시기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1987년 헌법도 철저하게 1노3김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선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가 있는 2010년, 늦어도 선거가 없는 2011년까지는 개헌을 마무리해야 하는 이유다.

김진국 정치·국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