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색깔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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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내가 누구냐」 또는 「내가 나임을 입증하는」「나」는 영어로「아이덴티티(identity)」다.「자기입증」「동질성」등으로 번역되지만 적합한 우리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세태의 격변속에 「나는 무엇이며,나의 위치는 어디인가」하는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된다.이 방황은 「아이덴티티의 위기」로 불린다.94년 91세로 타계한 하버드대의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이 만들어낸 말이다.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다 미국에 귀화한 그는 아이덴티티를 「변화속에서도 자신의 내적(內的)지속성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으로 정의했다.에릭슨은 히틀러.루터 등 역사적 인물들의 정신분석에 관심을 가졌다.그 한 대표 작이『간디의진실』이다.
그는 간디의 인격형성과 인도의 정치사회적 역사의 전개과정을 나란히 추적해가며 간디의 아이덴티티와 국민들이 그 혁명적 리더십에 뒤따를 마음의 준비가 갖춰지는 역사적 접점(接點)을 찾아냈다.이 교차점이 간디의 진실이자 비폭력 불복종의 기원이다.
우리 정치권에 색깔 논쟁이 재연되고 있다.정당의 아이덴티티는「누구의 당」이 고작이다.「내적 지속성」에 대한 자신감이나 이념적 일관성도 찾아보기 어렵다.「초록은 동색(同色)」인 처지에서로 쳐다보며 색깔 투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우습다.
정치적 견해차이를 법으로 제도화한 것이 정당이다.그 색깔은 단색(單色)일 수 없고 다양한 색조를 띠게 마련이다.여러 색조가 내부의 견제.균형.조화를 통해 하나의 아름다운 「무지개」로국민 대중에게 꿈을 심는 일이 중요하다.이 융화 와 정치적 화학(化學)은 「내적 지속성」과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의 몫이다.
「안정속 개혁」「보수혁명」은 말의 혼돈을 넘어 멕시코의 교훈을 떠올리게 한다.멕시코는 1929년「개혁의 제도화」를 위해 「제도개혁당」을 창설했다.이후 6년마다 대통령은 바뀌지만 대통령은 입법권까지 주무르며 후계자를 손수 고른다.조 직화된 이익집단 위주의 개혁은 국민 대중과 유리되게 마련이다.
다투어 영입경쟁을 벌이는 우리 정당들은 당선 가능성에 눈이 먼 일종의 정치적 색맹(色盲)들이다.그 지도자의 아이덴티티와 리더십 부재(不在)를 스스로 고백하는 한국정치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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