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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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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기적은 기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Miracle doesn't happen miraculously)."

정동영은 평생 스승 중 한 분으로 최상용 전 일본대사를 모시고 있다. 그는 1970년대 말 서울대 국사학과 복학생인 정동영을 가르쳤다. 그 전에 정동영은 반(反)박정희.반독재 학생운동을 하다 군대에 끌려갔다.

정동영은 崔대사한테 기적의 내적 법칙을 배웠다. "기적은 행운이 아니다. 인간적 노력의 다른 이름이다. 진정 기적을 바란다면 성실하라, 전력투구하라"는 그런 메시지였다.

삶을 돌이켜 보면 누구에게나 기적 같은 일이 있게 마련이다. 정동영도 마찬가지다. 스물다섯살 때 MBC방송사 입사시험을 봤다. 그 방송사의 대주주는 살아 있는 권력이던 박정희 대통령의 5.16장학회였다. 면접시험에서 방송사 사장은 "현재의 시국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정동영의 머릿속에선 여러 계산들이 교차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선 이미 "유신은 망할 것입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유신체제는 막다른 길에 들어섰고, 지금이라도 철권통치를 포기해야 하고… 등의 말이 이어지자 사장은 말허리를 잘랐다. "됐습니다. 나가 보세요." 그의 MBC 입사는 작은 기적이었다.

정치 입문 8년째, 쉰한살의 정동영이 이룬 성취는 기적 같은 것이다. 이회창씨를 제외하고 누구도 정동영만큼 짧은 시간에 이토록 권력에 가까이 접근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여당 대표에 선거대책위원장까지 거머쥐었다. 각종 여론조사는 차기 대선에서 그를 가장 유망한 주자로 꼽고 있다. 그의 경쟁력은 정확한 의사소통 능력과 뛰어난 순발력, 핸섬한 얼굴이다. 악바리 근성은 그의 감춰진 힘이다.

하지만 권력은 말과 이미지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근성만으로도 부족하다. 권력의 정점을 꿈꾸는 사람은 방송 앵커나 정당 대변인과 다른 종류의 덕(德)을 축적해야 한다. 그의 실력은 카메라의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뒤 냉정하게 평가받는다. 정동영의 오늘은 위태하다. 노인폄하 발언엔 오만이 묻어 있다. 명색은 여당 대표지만 여권의 실세들은 그의 내면의 축적을 의심하고 있다. 지금보다 몸집이 불어날 열린우리당은 총선 뒤 본격적인 권력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정동영은 기적보다 축적이 필요한 정치인이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