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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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뉴욕의 사무실에 전화하여 이혼 사실을 알릴까.마침 그가 없으면 어디의 누구라고 핑계댈까.
다행히 우변호사가 받았다 해도 느닷없이 이혼했다고 하면 영락없이 기겁을 하며 자책할 것이다.동시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그에게 부담감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 먼저 서여사를 찾는 것이 순서일 듯했다.외할아버지가 소장했던 미술품 책자 출판을 내맡긴 채 달반이나 지났다.데면데면한 여자라며 한심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덴마크 다녀온 후로 곧바로 이혼하느라 경황이 없었다.돌이켜보면 치열하게 타다가 보낸 여름이었다.그새 아리영의 인생무대는 2막에서 3막으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서여사에게 이혼 사실을 알리면 통찰력이 있는 그녀는 곧 아리영의 속마음을 내다볼 것이다.꾸중을 듣든,금족령(禁足令)을 받든 서여사에게만은 사실대로 알리고 싶었다.마음을 단단히 먹고 출판사 사무실에 전화를 하려는데 수화기가 먼저 울 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지금 뉴욕은 밤중이다.혹시 밤늦게 집에 들어간 우변호사가 전화해 온 것이 아닌지.심장이 멎는 것같았다.황급히 수화기를 들자 쩌렁쩌렁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가씨!쌍둥이 하르망올시다.』 제주댁이었다.실망과 의외로움이 교차됐다.
『아,아주머니.안녕하셨어요? 거기 서귀포예요?』 『여기,서울이외다.댁 근처 공중전니다.아가씨 뵈러 올라왔지요.』 『저를요?』 좀처럼 서울 나들이하는 일이 없던 제주댁이 웬일인가.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집은 찾으실 수 있어요? 제가 그리로 모시러 갈까요?』 『아닙니다.애비가 잘 적어 주었어요.곧 찾아뵙겠습니다.』 바로 언덕 아랫골목에서 전화했는지 제주댁은 득달같이 대문으로 들어섰다.말린 옥도미 두름이랑 자리돔 젓갈 항아리 한보따리를 마루에내려놓더니,큰절부터 했다.
『아가씨,이 몹쓸 죄를 용서해주십쇼.』 그녀는 느닷없이 펑펑울기 시작했다.울면서 계속 이마를 조아렸다.
『울지마셔요.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아리영은 제주댁을 안방아랫목에 앉혀 곤혹스레 물었다.
『이혼을 하셨다지요?』 제주댁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 몹쓸 년 때문에 이혼하신 거지요? 그 년이 애 가진 것때문에 이혼하신 거 아닙니까?』 제주댁은 울부짖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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