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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요도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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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평양으로 기수를 돌려라.” 1970년 3월 31일 오전 7시35분. 승객 131명, 승무원 9명을 태우고 하네다 공항을 이륙한 여객기 한 대가 후지산 상공에서 무장괴한들에 의해 공중 납치됐다. ‘요도호’란 애칭이 붙어 있던 일본항공(JAL) 국내선 보잉727기였다. 이들은 애초 목적지였던 후쿠오카 공항에서 여성·노약자 등 23명을 풀어주고 급유를 받은 뒤 북쪽을 향해 현해탄을 건넜다.

한 시간 남짓 지난 뒤 요도호가 다시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항 건물에 ‘평양’이란 간판이 걸려 있고, 북한 군복 차림의 여성이 ‘평양 도착 환영’이란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평양이 아닌 서울의 김포공항이었다. 북한행을 저지하려는 한·일 당국과 미군이 관제사와 기장 간의 교신을 이용해 납치범들을 속인 것이다. 하지만 눈속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평양에 있을 리 없는 미국 항공사 ‘노스웨스트’의 마크를 단 비행기가 활주로에 서 있는 장면이 납치범의 눈에 띈 것이다.

인질 100여 명의 목숨이 걸려 있어 섣불리 강제진압을 할 수도 없던 상황을 뚫은 것은 그 사이 급파된 야마무라 신지로 일본 운수성 심의관의 용기와 기지였다. 납치범들은 “내가 대신 인질로 잡혀 평양까지 동행할 테니 대신 승객들은 석방하라”는 야마무라 심의관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우여곡절 끝에 요도호는 납치된 지 3박4일 만에 평양공항에 내렸고 납치범 9명은 그들의 의도대로 북한에 망명했다.

대부분 20대 초반이었던 범인들은 일본의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결성한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소속이었다. 그들이 여객기 납치란 극단적 방식을 동원해서까지 북한 망명을 단행한 것은 ‘세계 동시혁명’의 근거기지로 북한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진정한 ‘노동자국가’로 믿어 의심치 않던 북한에 무장기지를 건설하고 이를 토대로 ‘북한발 세계혁명’을 꿈꾼 것이다. 그 이후 38년간 일어난 세계사의 변화를 생각하면 참으로 황당무계하고 한편으론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때 북한은 이들을 체제 선전과 해외 공작 활동에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이 3명이 숨지고 2명은 일본과 동남아에서 체포돼 북한에 남아 있는 범인은 4명으로 줄어들었다. 북한은 최근 일본과의 협상에서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사자의 희망에 따른 인도주의적 입장을 강조하지만 그 속셈은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노린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속담은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세계 동시혁명’이란 신기루를 좇아 북한을 찾은 그들은 40년 가까운 세월과 함께 어느새 북·미 간 거래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