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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 엄숙한 촬영을 놀이로 바꿨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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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 16면

SLR클럽·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등 사진동호인들이 지난 4월 전남 화순 세량지에서 봄풍경을 촬영하고 있다. 세량지는 봄·가을 풍경이 좋아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약속이나 한 듯 몽골여행을 함께한 일행의 손에는 전부 디카가 들려 있었다. 하는 일과 관심이 다르며 나이 차도 많은 사람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공감대는 사진이다. 그들은 눈앞에 스치는 드넓은 초원의 풍광과 유목민의 얼굴이 사라지기 전에 디카부터 꺼내 들었다.

디카는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았나

이제 우리는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진 찍기 위해 세상을 바라본다.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은 기억의 방법을 바꾸어 놓는다. 지난 만 년 동안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던 인간의 습속은 셔터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대치되었다. 도구의 진화가 가져다준 변화는 보통사람마저 기록자로 만들었다. 촘촘한 기록수단을 지닌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 둘 것이다.

과거에는 프로만 카메라 소유
디카 이전에도 카메라는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고 이를 보았다. 하지만 사진 찍는 이의 숫자는 전 세계 인구 60억 명 가운데 극소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필름이건 디지털이던 카메라의 기능은 똑같다. 왜 디카가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었을까?

재료의 한계와 방법을 극복했다는 점이 아닐까. 필름 한 통으로는 기껏해야 서른여섯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을 뿐이다. 재료는 언제나 충분하게 준비해 두어야 한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동차의 연료는 항상 여분을 준비해 두어야 하듯이. 기름과 필름을 여유 있게 확보하는 일은 똑같이 돈이 든다. 필름은 언제나 아껴 써야 하며 남은 필름의 수만큼 의식의 한계로 작용한다. 제아무리 성능 좋은 카메라도 필름이 떨어지면 무용지물이다. 디카는 한 번에 수천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늘어난 여유만큼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부담 없이 다가선다. 원 없이 휘둘러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재료의 발명은 더 세밀하게 자신의 관심을 사진으로 확인시킨다. 배부른 자의 여유가 곳간에서 출발하는 이유와 다를 게 없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풍요의 확보는 기술의 진보로 더 큰 가능성을 만들어간다. 누르면 100% 사진 찍히는 마법의 도구 앞에 매료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디카는 실수 할 확률이 더 적다. 카메라 제조사의 개발자들은 최고의 석학과 엔지니어들로 포진되어 있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의 효용성을 가장 먼저 확신한 사람들이다. 보통사람들의 촬영공포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았다.

흔들리지 않은 사진을 찍는 하는 기술은 이제 보편적 기능으로 디카에 탑재되어 있다. 사람의 얼굴만 추적해서 최적의 모드로 결정해 주거나 웃는 장면만을 쉽게 찍는 기능도 이미 나와 있다. 더 나은 렌즈의 성능은 벌레의 솜털이나 눈알까지 선명하게 묘사해 준다. 필름 카메라 시절 이러한 표현은 전문적 지식과 장비를 갖춘 프로들만의 몫이었다.

디지털 기술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놓았다. 사람들은 디카를 살 몇 십만원 정도의 돈만 준비하면 그만이다. 이 가격은 현재의 생활수준으로 그리 비싸지 않다. 디카만 있으면 평생 사진을 업으로 삼고 있던 사람들의 경험과 노우하우는 통째로 자신의 것이 된다. “인간을 위한 기술은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명제는 참이다.

디카의 등장을 불안해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필름 카메라로 찍어야만 진정한 사진이며 디지털은 애들 장난 정도로 치부하는 완고한 의식의 예술가들이다. 디지털 기술과 방법은 필름이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을 이미 실현했다. 사진의 진화는 언제나 그랬듯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촬영이 놀이가 된 세상
필름과 디지털의 차이는 재료와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다. 인간이 담당해야 할 몫은 여전히 똑같으며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다. 본질을 외면하고 방법만을 고집하는 오류는 위험하다. 황토 구들장에 서까래 놓여진 집에 살아야 최고의 주거형태라 믿는 외로운 국수주의자와 다를 게 없다.

그들은 진중한 촬영행위를 놀이처럼 바꾸어버린 경박한 사진 찍기를 경멸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벼움은 디지털 시대의 방법론이다. 더 쉽고 간편하게 자신의 관심을 표현하는 데 불필요한 형식과 억압은 방해요소다. 인간은 자유로워야 풍부한 상상력이 생기고 복잡하지 않아야 더 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가벼운 디카가 무거운 필름 카메라의 결과물에 비해 열등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새로운 세대들의 첫 카메라는 당연히 디카다. 이들은 사진은 몰라도 디카의 효용성은 더 많이 안다. 누르기만 하면 세상을 소유할 수 있다는 놀라운 발견 앞에 금기는 없다. 조직과 국가의 구성원만으로 존재하던 개인이 제 목소리를 내게 된 흐름이 바탕이다.

싸이월드와 블로그를 뒤덮은 사진들은 현재의 관심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젊은 층의 전유물이었던 인터넷은 장년층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제 모든 사람은 이미지의 생산자이며 소비자들이다. 1인 언론매체의 소유는 자기가 본 세상을 모두의 이야기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제 언어를 대체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이미지다.

문제는 디카가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의 여부다. 가장 쉬운 기록과 표현의 방법이 된 사진의 힘을 문화로 격상시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사진 찍기의 결과가 훌륭한 작업물로 바뀌어 개인적 성취의 방법이 되는 일이 중요하다. 출판 관계자들이 블로거들의 콘텐트를 발굴해 내는 노력은 의미 깊다. 스타는 저 멀리 있지 않다. 누구나 스타가 될 가능성을 꿈꾸는 세상은 역동적 에너지로 가득 찰 것이다. 그 중심에 우리나라가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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