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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촛불과 은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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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일 포스티노’라는, 1996년에 상륙한 좀 케케묵은 영화가 있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 영화인데, 다시 봐도 내게는 늘 신선한 개봉작이다. 시인 황지우는 이 영화와 같은 제목의 시를 한 편 썼고, 학생들에게 시의 은유를 가르칠 때 딱 좋은 교재라고 말한 적도 있다. 이 느리고, 답답하고, 그러나 낭만적인 슬픔이 가득한 영화는 어느 틈에 시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거의 필수적인 교재가 된 듯하다. 시종 영화의 이면을 타고 흐르는 은유 때문이다.

세계적인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순정한 시골 청년 마리오의 만남도 은유고, 그들의 대화도 은유고, 우편배달부가 된 마리오가 시를 읽고 쓰며 사랑과 세상에 눈뜨는 과정도 은유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을 녹음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도 뛰어난 은유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이념적인 갈등도 은유 속에 부드럽게 용해되어 있다.

은유란 두 개의 의미를 견주어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수사의 하나다. 전혀 다른 의미가 서로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놀라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흔히 차별성과 유사성의 개념으로 설명이 된다. 즉 서로 차별되는 것들에 내재된 유사성을 길어 올리는 게 은유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서로 다른 것들이라고 해서 다 다른 건 아니다. 은유는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하기 위해 서로 다른 것들을 화해시키는 고도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촛불과 연탄은 용도가 다르지만 똑같이 불꽃을 품고 있으며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타자를 위해 사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촛불과 사찰은 경건함을 같이 함의하고 있고, 연탄과 삼겹살과 소주는 서민의 애환이라는 관념과 내통하는 사이다.

이에 비해 차별성은 ‘나는 너하고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선언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우리는 그들하고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당선자’를 구태여 어색하게 ‘당선인’이라고 부를 때부터 알아봤다. 문민정부-국민의 정부-참여정부로 이어지던 정권의 명칭을 과감하게 이명박 정부로 불러 달라는 발상도 위험해 보였다. 은유를 얕잡아보는 시각이 그리 만들었다. 50% 가까운 지지율이 과도한 자신감을 부과했을 것이다. 어찌 해야 하나.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국정 최고책임자를 친구 이름처럼 ‘명박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을.

차별성을 부각시켜 정권을 잡았으면 이제 유사성을 활용해 국가를 경영할 때다. 여전히 지난 10년 정권의 바지를 잡아 끌어내리려는 일련의 일들은 볼썽사납다. 진정 국민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과 바둑이라도 한 수 두어보라. 정적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그이들은 다르지만, 다른 것 속에 숨어 있는 같은 점을 찾아낼 때 국민들은 감동한다. 이걸 알지 못하니 물대포로 촛불을 끄려는 일도 생긴다.

촛불 정국에 대처하는 모양도 은유를 모르는 해법 일색이다. 곧바로 제기하는 배후설도 그중 하나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배후’라는 용어만큼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정치적 언어는 없다. 마음에 안 들면 무조건 좌파로 몰아가려는 것은 위험하다. 이제 그런 허술한 은유는 통하지 않는다. 촛불의 배후를 묻자 한 고등학생이 말했다. “양초 파는 할머니예요.” 나한테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고3 아들이지요.”

저 1980년대의 화염병을 촛불로 바꾼 것은 분명히 우리 국민의 위대한 은유적 표현방식이다. 이 촛불은 화염병의 불꽃보다 작고 연약하다. 언제 쉽게 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느 때든 쉽게 불꽃을 댕길 수 있어 오히려 강력하다. 국민들은 80과 08의 차이를 알고 앞서가는데, 아직도 80년대식 죽은 은유를 붙잡고 쩔쩔매는 이들이 안쓰럽다.

이 촛불을 한낱 장난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그 누구도 어려서 촛불로 장난을 해본 적이 없다. 촛불에 손을 데였다는 사람도 나는 보지 못하였다. 제삿날 큰집으로 가면 상을 물린 뒤에 큰아버지는 촛불을 입으로 불어 끄지 않았다. 촛불의 심지를 엄지와 검지로 잡고 경건하게 눌러 껐다. 그 누구도 촛불을 함부로 범해서는 안 된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