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특별기고>박승교수가 본 '大전환 시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금세기가 저물면서 이 지구상에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변과혼돈이 속출하고 있다.
동구권의 붕괴,독일 통일,세계화의 물결,일본 자민당정권의 붕괴,엔고와 장기불황 등을 열거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과거의자(尺度)로는 잴 수 없는 변화들이 툭툭 터지고 있다.어찌된 일인가. 이러한 사건들은 외견상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밑바닥을 보면 하나의 역사적 흐름에서 인과되는 연관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산오름에는 아주 가파른 깔딱고개가 있고 강물흐름에는 어떤구간에 폭포의 단층이 있듯이 역사발전도 그러한 것이다.
평상시의 역사는 기존의 지배질서 아래서 각자의 위상변화를 그본질로 하는 것이지만 어떤 고비에서는 지배질서 자체의 틀을 다시 짜는 대전환기가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한세기에 한번쯤 있을까 말까한,그러한 기본질서의 변화를 내용으로 하는 대전환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대전환은 18세기말에 있었다.
그때는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이른바 영국패권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 다음의 대전환은 19세기말에 있었는데 그 내용은 지구패권을 영국으로부터 미국과 소련이 넘겨받은 것이다.이러한 미-소패권질서는 지금까지 한세기동안 지속되었는데 그 기본구도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미-소 이념대결을 기본으로 하는 동서 질서며, 다른 하나는 선.후진국간의 주종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남북질서 또는 수직질서다.
이러한 기본질서를 바탕으로 해 지금까지 모든 균형과 안정이 유지되어 왔는데 지금 이것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소련의 패권은 이미 무너졌으며 미국의 패권도 급속도로 퇴조하고 있다.
세계의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비중은 40년전의 50%에서 지금은 25%로 반감했으며,향후 20년 뒤에는15%로 떨어져 중국에 추월당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지구를 지배하는 기본질서가 무너짐에 따라 새 질서를 창출하기까지의 과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금 이 세계는 질서와 힘의 공백이 생기고, 이로 인해 교통신호가 고장난 도시 같은 불안과 혼돈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면 새 질서는 어떻게 세워지고 있는가.패권시대는 이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짜여지고 있는 새 질서의 기본방향은 다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세계화질서다.이것은 동구권 붕괴의 필연적 산물이다.동서냉전체제 아래서 미국은 서방세계의 장형 노릇을 해왔다.
장형의 역할은 자기 이익을 희생하고 전체 형제들의 안전과 화목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동맹국들을 지원했던 것인데 소련이 넘어지면서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됐다.
그래서 미국은 이제 체급에 관계없이 같은 무게의 글러브를 끼고 같은 룰을 적용해 결투를 벌여 먹이의 주인을 결정하자고 하게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세계무역기구(WTO)며 세계화다.
즉 미국은 이제 자국 이익만 생각하는 평범한 국가로 되돌아간것이다. 일본은 냉전체제의 최대 수혜국이다.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한 보루로 대접받아 막대한 지원과 국방무임승차,그리고 일본식 중앙주의적 성장이 허용돼 오늘날 경제대국이 됐다.
그런데 동구권의 붕괴로 인해 더이상 그러한 일본식 성장이 허용될 수 없게된 것이다.그래서 엔고와 불황,그리고 자민당정권의붕괴 등 정치.사회적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환경변화도 바로 세계화질서로 연결되고 있다.
두번째는 수평질서다.그동안의 경제발전은 유럽.북미 등 특정지역이 독점해 오면서 지구인구의 8할은 빈곤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하여 이들 선.후진국간 수직적 주종관계가 유지돼온 것인데이것이 무너지고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발전에 참여하는 평등호혜의 수평질서가 태동하고 있는 것이다.금세기 후반부터 수많은 나라가 개발대열에 참여해 이미 개도국들의 생산비중 이 세계 전체의 거의 절반까지 이르게 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태지역은 성장중심권으로 부상해 아태지역의 GDP는 북미지역에 비해 30년전에는 25%였으나 현재는 70%에 이르고 있으며 20년 뒤에는 북미지역을 추월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앞으로는 국제적으로 상품뿐 아니라 노동.자본.기술.문화 등 생산요소까지도 자유이동하게 될 것이므로 바야흐로 세계는 발전확산시대를 맞게 된다.
산업과 생산성의 자유이동이 막힌다면 인구가 살기 좋은 곳으로이동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그리하여 다음세기중에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선진국 수준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선.후진국간의 주종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수직질서는 수평질서로 대체되고 세계는 지구등권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경제면에서도 부품과 공정분업(工程分業)을 중심으로 하는 수평분업이 중심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옛질서가 무너지고 새질서가 형성되는 과도기가나타나는 역사적 대전환은 우리에게 어떤 충격을 몰고 오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창조적 파괴」라 할 수 있다.새질서를낳기 위해 낡은 것을 무너뜨리는 현상인데 그러한 충격은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기득권 파괴현상이다.경제적으로는 국내 독점권의 무용화,기존 자산가치의 무용화,기존기술과 지식의 무용화 현상이 생긴다.판단기준이 되는 잣대가 변하기 때문에 기존 권위와 관행, 그리고 가치도 무너진다.
예컨대 직장관이나 정치적 선호도 바뀌며 인기학과와 인기직종도바뀐다.그래서 이변이 생기는 것이다.
둘째로 산업파괴 현상이다.산업의 흥망은 비교우위가 아니라 절대우위에 의해 결정되며 절대우위는 독점요소에 의해 판가름된다.
자본.노동.토지.기술 등 네가지 생산요소를 놓고 보면 기술과토지 만이 독점요소며 노동과 자본은 흘러다니는 것이다.
***과도기의 충격파 절대우위가 없는 산업의 대규모 도태가 불가피하며 절대우위산업도 기술의 라이프 사이클이 단축되고 있기때문에 산업의 무상한 부침과 불안은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다.
셋째로 가격파괴현상이다.새로운 세계질서 아래서 생산은 가장 싸게 생산할 수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그 제품은 가장 비싸게팔 수 있는 곳에서 팔리게 될 것이다.그 결과로 물가는 세계적인 하향평준화를 지향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가가 가장 싼 수준으로 모든 나라에서 같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범세계적인 생활수준 향상을 가져올 것이며 한편으로는 취약산업의 파괴를 촉진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조직파괴현상이다.세계화와 수평화를 기본으로 하는 새질서에서 모든 조직은 단위세포 중심체제로 이행해가게 된다.
사회조직은 집단 중심에서 개인중심,획일에서 다양화, 그리고 의사결정은 하향식에서 상향식으로 이행한다.
정치조직면에서는 중앙집중에서 지방분권을 지향하고 국가나 국경의 개념은 절대개념에서 상대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즉 국가란 부국강병의 주체가 아니라 동질적 이익집단의 의견을수렴하는 기구,즉 연방국가의 주정부와 같은 기능을 지향할 것이며 국가는 민족.종교와 같은 동질성 중심으로 분할돼 그 수가 크게 늘어나고 직접민주주의가 발전할 것이다.
기업조직면에서는 규모의 경제보다 전문화경제가 긴요하게 돼 기업집단의 해체,대기업의 분사화(分社化),그리고 생산의 현지화가촉진될 것이다.
***새질서와 한국의 장래 그렇다면 이와같은 역사적 대전환은우리나라의 향후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단기적으로는 악재로 작용할 우려가 크다.지금까지의 정치.경제.사회적인 체제를 유지해온 안정과 균형의 구심력이 단절됨으로써우리사회는 단기적으로 혼란과 충격,갈등과 불안,그리고 불확실성이 증폭될 것이다.
의식구조와 가치관의 단절은 커질 것이며 정치적 갈등과 불가측성은 심각할 것이다.경제면에서는 산업이 새판을 짜는 과정에서 무수한 희생자가 줄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때 지구의 신질서는 한국 발전에 호기(好機)가 될 것이다.기본적으로 한국은 자원부족.지식우위국으로서 세계화와 수평화의 새질서에서 수혜국이 될 것이다.
그뿐 아니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그동안의 미-일축(軸)에서 중국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을 중심으로 하는 동남아축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데 동남아지역이 21세기 세계 경제성장의 중심지가 된다는 점도 우리에게 매우 고무적인 전 망을 하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성장이 아니라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해야한다는데 있다.
잘 사는 나라란 생활의 내용이 좋은 나라를 말하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장래는 그렇게 밝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경제가 성장할수록 우리는 고물가고지가국(高物價高地價國)을 지향하고 있을뿐 아니라 환경.교통.교육.주거공간 등 삶의 내용을 결정하는 공공재의 부족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우리는 대전환기 변혁에 능동적인 적응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특히 경제면에서는 성장보다 생활공공재의공급을 늘리고 저물가 사회를 이룩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모아야할 것이다.
▶36년 전북 김제 출신 ▶서울대 상대,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한국은행(61~76년) ▶중앙대 정경대 교수(76~88년) ▶중앙대 정경대 학장(84~87년) ▶세제발전심의위원회위원(84~88년) ▶한국국제경제학회장(86~87년)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86~88년) ▶중앙대 대학원장(87~88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88년2~12월) ▶건설부장관(88년12월~89년7월)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90년 이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