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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르포] 19년 경력 '선거 베테랑' 이운행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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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 선거자원봉사자 이운행씨가 5일 모 정당 선거사무실에서 김밥을 먹고 있다. 선거운동원 생활 19년 만에 점심을 김밥으로 때우기는 처음이라고 李씨는 말했다. [신인섭 기자]

5일 점심시간, 서울 영등포 모 정당 후보의 선거운동 사무실.

이 정당 '서울시지부 지역발전위원회 부위원장'이란 직함을 갖고 있는 이운행(55.李雲行)씨가 점심식사로 나온 김밥을 집어들었다.

"옛날에는 선거사무소에서 아예 식당을 정해놓고 설렁탕.육개장.삼겹살 등 맘대로 먹도록 식권을 쫙 뿌렸는데…. "

선거자원봉사자로 나선 李씨는 예전의 '선거 인심'이 사라져 아쉬운지, 아니면 며칠째 계속되는 김밥 식사에 신물이 났는지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 어떤 식사 대접도 허용하지 않는 선거법 때문이다. 그나마 김밥은 '다과'에 포함돼 다행이었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활동비가 지급되는 선거철의 풍요는 이제 지나간 꿈이야."

그가 처음 선거판에 뛰어든 계기는 아주 우연이었다. 전남 출신으로 모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인천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李씨는 1985년 총선 직전 교회에 남아도는 사무기구를 주려고 인천에서 출마한 야당 모 후보의 선거사무실을 찾았던 것이 19년 경력의 '선거꾼'으로 만들었다. "목소리가 유세에 딱 어울린다"는 제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지역차별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야당 지지활동이 민주화에도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지."

자신의 첫 선거 참여에서 야당 후보의 선전부장을 지낸 李씨는 이후 줄곧 같은 인천 지역에서 야당을 위해 뛰었다. 선거 때마다 후보는 달랐지만 李씨는 13대(88년).14대(92년) 총선에선 총무부장, 15대(96년).16대(2000년) 총선에선 동책협의회장을 지내며 '선거 베테랑'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李씨는 선거운동원으로 받는 돈의 액수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12대와 13대 선거는 정말로 '돈잔치'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유세차 타고 나가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금방 모여들지. 하지만 돈 봉투, 하다못해 비누 한장이라도 안 돌리면 금세 흩어지더라고. 유권자들에게 갈비탕을 돌린 뒤의 흐뭇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경쟁 후보 측에서 돈 봉투를 돌려 허탈감에 빠지기도 했어."

특히 17년 만에 소선구제가 부활된 13대 선거가 절정이었다. 1등만 살아남는 소선구제가 도입되면서 돈 뿌리기는 절정에 달했다. "우리 후보 측 비리를 폭로하고 캠프를 떠나면 수억원을 준다는 제의까지 들어왔으니까."

96년의 15대 총선에서도 변화를 감지하긴 어려웠다는 李씨는 "상대 후보 측에서 유권자들을 끌어 모아 지방 견학이다 뭐다 시키는데 속이 바짝 탔다"고 설명했다.

선관위가 눈에 핏발을 세운 2000년부터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15대 때 741건이었던 선거법 위반 건수가 16대에서는 3017건으로 4배 이상 늘었다. 그래도 李씨에게 16대 선거는 '4전5기'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운동한 후보를 당선시킨 선거였다. 당선 사례금으로 100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첫 선거를 경험한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갈 수 없었다. 12대 총선 이후 인천공단에 가구공장을 차려놓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자의반 타의반 철새처럼 선거판으로 되돌아갔다. 올해 총선에도 자원봉사를 자청했다.

李씨는 "요즘엔 향응이나 돈잔치는 어림도 없어. 그렇지만 선거는 아편 같은 거야. 다시는 안 한다고 하면서도 선거철만 되면 발길이 이쪽으로 온다니까"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고란 기자<neoran@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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