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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문화] "쉬쉬하던 여자의 性, 이제 무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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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홍콩 연극계에서 25세의 초등학교 여교사가 만든 게릴라 극단 '플레이 하우스'가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극단을 조직하고, 금기시되던 여성들의 내밀한 성(性)담론을 들고 나와 신세대의 공감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 극단은 지난달 '음도독화(陰道獨話)'란 연극을 여섯차례 공연했다. 원제목(영어)은 '버자이너 모놀로그(Vagina Monologue)', 우리 말로는 '음부의 독백'이란 뜻이다.

지난달 홍콩문화센터에서 공연된 '음도독화' 포스터(左)와 25세의 공연감독 릴리 찬. 무명 배우들(右)이 출연해 더욱 화제를 모았다.

*** 25세 여교사가 극단 이끌어

중화권에서 성문화가 비교적 보수적인 홍콩의 풍토에선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더욱이 '플레이 하우스'극단은 이름없는 신인들뿐이다. 지난해 8월 창단했지만 사무실도 연습 장소도 없다. 연출자.배우.무대 스태프도 매번 바뀐다. 회원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공연.이벤트 수익금으로 꾸려나간다.

극단 창립자이자 행정 총감독인 릴리 찬(중국명 陳雅莉)을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만났다. 그녀는 홍콩 변두리인 신제(新界)지역의 초등학교 4학년 교사였다. 연극 경력으로 따지면 왕초보다. 그녀는 "무대 경험이라곤 초등학교 시절 학예회에서 노래 부르고 사회보고 춤을 춘 게 전부"라고 말했다. 하지만 "연극을 통해 꿈과 상상력을 터뜨리고 사회를 향해 무언가 제안하기 위해 극단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긴 생머리에 화장기가 전혀 없는 그녀는 잘 웃었다. 약속 장소인 침사초이 지하철역의 DHL점포 앞에 도착한 것은 지난 2일 저녁 7시. 얼굴을 몰라 10여분간 서로 마주보다가 동시에 휴대전화를 꺼내들고서야 박장대소했다. "교장 선생님이 이런 연극을 하는지 아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알게 되면 틀림없이 그만두라고 할 텐데…"라고 했다.

-왜 하필 '음도독화'라는 민감한 작품을 택했나.

"내가 고른 게 아니다. 극단은 매년 '10인 집행부'를 구성한다. 거기에서 격론 끝에 선택한 것이다. 집행부 멤버 중 미국 유학을 가 연극계에서 활동하고 이 작품에 출연했던 사람이 있다. 홍콩 여성들도 성을 얘기하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강하다. 그걸 깨자고 의견을 모았다."

-출연 배우와 무대 스태프는 어떻게 모았나.

"지난해 10월 인터넷과 여성단체를 통해 공모했다. 배우 파트에 100여명이 지원해 오디션을 했다. 그 중 20명을 뽑았다. 우리는 인터넷 사이트(www.geocities.com/playhouse_theatre)가 사무실이고 회의 장소이자 연락처다. 정말로 얼굴을 맞대고 토론해야 할 때는 회원 집이나 커피숍에서 만난다. 배우들은 20세 전후가 대부분이다. '25세는 늙었다'고 말한다. 절반이 학생, 절반은 직장인이다. 연극을 해 본 사람은 세명 중 한명꼴이다."

*** 회원제 … 인터넷이 사무실

-주연을 맡은 모모코(중국 이름 鄭之慧.23)가 작품 속의 여성처럼 자궁암 환자여서 화제인데.

"미국 유학 중이던 열일곱살 때 난소암 증세를 발견했다고 한다. 의사는 '30세를 넘으면 기적'이라고 진단했다. 모모코는 그뒤 '짧은 인생에서 벌주(罰酒.하기 싫은 일)는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한 뒤 연극에 몰두하고 있다. 이번 작품도 사실상 그녀가 주도했다. 나는 뒷받침만 했을 뿐이다."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

"76석짜리 극장에서 여섯번 공연했다. 공짜 손님이 한명도 없었는데도 매번 만석(滿席)이었다. 모두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박수를 멈출 줄 몰랐다. 홍콩인들의 머릿속에 있는 '금지 구역'을 하나 깨뜨렸다고 생각한다."

-중국 대륙에서 공연할 계획은 없나.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의 민간 극단에서도 이 작품을 공연하려 했다. 하지만 검열 당국에서 '음도'라는 단어를 빼라고 해 좌절됐다고 한다. 그 단어를 빼고 어떻게 공연할 수 있겠는가. 홍콩에선 '15세 이상 관람'이라는 제한 조건밖에 없었다."

-다음 공연에는 무슨 작품을 할 것인가.

"오는 10일께 집행부 회의를 열어 결정한다. 원칙적으로 연 4회 공연을 하되 한번은 창작극, 한번은 영어 연극을 한다는 합의만 해놓은 상태다."

홍콩=이양수 특파원

***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미국의 극작가.사회운동가인 이브 엔슬러가 여성 수백명을 인터뷰한 뒤 그들의 성경험을 바탕으로 쓴 연극. 1996년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으며, 97년 오프 브로드웨이 최고의 작품에 수여하는 오비상을 받았다. 우피 골드버그.기네스 팰트로.위노나 라이더 등 유명 여배우들이 출연했다. 국내에서는 2001년 5월 연극배우 김지숙씨 등 3명의 토크쇼 형식으로 초연됐다. 여성 성기를 가리키는 우리말 '××'가 대사에 나와 화제를 일으켰으며, 객석 점유율 90% 이상을 기록했다. 같은해 11월에 1인극으로 각색, 연극배우 서주희씨가 주연을 맡았다. 2003년 11월~2004년 1월 서씨의 1인극으로 재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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