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겉만 보고 배울 거 없다니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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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미국식 경영에 편승했고 ‘일본에선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며 과소평가했다.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저만치 앞서가면서도 곧 추월당할 것이라며 과대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달라져야 한다. 한국은 일본을 ‘좋은 교과서’로 삼아야 한다. 저성장과 노령화 사회, 저출산 등 이미 한국이 겪고 있거나 앞으로 겪을 일들을 일본은 이미 10년 또는 그 전에 경험했다. 후발주자는 앞선 사람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최대한 얻고 활용해야 한다.”

34년 삼성 재직기간 중 일본 주재만 20년, 나머지 기간도 일본과 관련된 업무를 해 국내 최고의 일본전문가로 꼽히는 정준명(64·사진) 전 삼성재팬 사장을 얼마 전 도쿄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즘 일본은 어떻게 변하고 있나.

“좋게 말하면 효율성이 더 나아지고 있다. 도쿄는 고층빌딩 숲이지만 비를 맞지 않고도 걸어 다닐 수 있는 지하 동선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밤에 빈 택시가 잔뜩 늘어서 있지만 손님도 많아 경제는 잘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화점들은 합병으로 덩치를 키우고 최고급 호텔도 증가하고 있다. 반면 ‘과잉 전자제품’ 시대에 산다는 느낌도 든다. 품질과 기능이 필요 이상으로 좋다는 생각이다. ‘오버 퀄리티, 오버 스펙’을 실감한다. 이런 첨단기기들이 중독증도 야기하지 않나 싶다. 언제, 어디서나 휴대전화로 뭔가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본의 노령화는 사회문제인데.

“아닌 게 아니라 노인들이 넘쳐난다. 1500조 엔의 개인 금융자산 가운데 65%를 65세 이상 노인들이 갖고 있다. 그래서 소비가 늘어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휴대전화 요금을 내느라 책이나 음반·잡지를 사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산업은 불황이다. 돈은 가진 사람들이 써야 하는데 노인들은 잘 쓰지 않는다. 경기에 활력이 모자라는 이유다.”

-한국인의 일본 평가는 적절한가.

“요즘은 한 해 300만 명이 일본을 다녀간다. 비자가 없어진 덕이다. 문제는 스시 좀 먹고 긴자에서 쇼핑한 뒤 ‘일본, 별거 아니네’라는 식으로 일본을 쉽게 생각한다. 일본 사회가 얼마나 치밀하고 서서히 움직이는지 그 속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은 정치가·관료·경영자·언론인·학자가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 비행기처럼 복합체를 구성, 나라를 독특하게 움직인다. 대일 무역적자는 예전에는 생산재나 기계 수입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최근에는 자동차·게임기 등 소비재가 주원인이다. 우리 스스로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한국인들이 중국과 일본을 보는 눈은.

“한국은 지금까지 경제를 이끌어온 헝그리 정신이 심하게 변질되고 있다. 일본은 10년 불황에서 완전히 탈피하진 못했지만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히 전진하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이나 우리와 가깝게 있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두 나라에 대해 역사부터 좀 더 근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근대사가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한국은 반미(反美)라는 환경을 만들면서도 영어와 미국식 경영에 지나치게 투자했다.”

-영어와 미국식 경영은 오늘날 세계화의 표준이 아닌가.

“한자 교육을 외면하는 것은 동양, 아니 한자문화권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립될 수 있다. 한자를 알고 안 쓰는 것과 몰라서 못 쓰는 것은 큰 차이다. 중국과 일본을 볼 수 있는 큰 그릇이 바로 한자다.”

도쿄=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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