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엔 ‘월가 알파걸’도 소용없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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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호 35면

미국 4위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의 에린 캘런(42·사진) 최고재무책임자(CFO)가 12일 결국 밀려났다. 리먼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여파로 올 2분기에 28억 달러 적자를 냈다고 발표한 바로 다음날이다. 그의 멘토인 최고자산운용책임자(COO) 조셉 그레고리도 함께 물러났다.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인 리처드 풀드를 제외한 핵심 경영자 2명이 쫓겨난 것이다. 실적 악화와 유동성 위기 소문 때문에 떨고 있는 투자자를 안심시키고 사내 분위기를 추스르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책임이 가장 큰 풀드 회장은 자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반전시킬 확실한 선장을 데려와야 하는데, 이번 인사는 너무 약한 조치라는 게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리먼브러더스 전 CFO 에린 캘런

캘런은 베어스턴스가 유동성 위기 때문에 무너진 지난 3월 리먼이 위기를 그런대로 넘길 수 있도록 힘쓴 주역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이번엔 리먼브러더스 차례’라는 루머가 월스트리트 안팎에 파다하게 퍼졌다. 경영진은 소문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둘러 기자회견을 열었다. 캘런은 풀드 회장 등 경영진이 머뭇거리는 사이 마이크를 잡고 회사 상황을 깔끔하게 설명했다. 회견을 마친 뒤 그가 리먼의 채권 트레이딩룸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기립박수로 맞았다. CEO에 버금가는 대접이었다.

하지만 리먼의 위기설은 최근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주가는 연일 급락했다. 리먼 내부에서는 위기 책임을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캘런과 그레고리가 앞장서서 벌인 헤지펀드 투자의 실패가 주요인으로 지목되면서 결국 두 사람은 동반 퇴진하기에 이르렀다.

캘런은 리먼의 투자은행 부문으로 돌아간다. 지난해 12월 CFO에 임명된 이후 6개월 만이다. 짧은 그 기간 동안 그에게는 ‘월스트리트의 여성 최고위직’ ‘투자은행 CFO의 새 모델’ ‘월스트리트 알파걸’ 등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투자은행 CFO들이 미디어 노출을 꺼리지만, 그는 적극적으로 언론 앞에 나섰다. 가능한 한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지론을 앞세웠다. 그는 또 회계장부뿐만 아니라 회사의 투자전략과 기법까지 포괄적으로 파악하고 대응했다. 일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 일반적인 CFO 업무를 초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캘런은 세법 전문 변호사였다. 로펌에서 일하다 1995년 리먼에 영입됐다. 2000년 식품회사 제너럴밀즈의 인수합병(M&A) 딜을 매끄럽게 처리하면서 유명해졌다. 그는 패션 감각도 뛰어나다.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액세서리를 잘하는 여성으로 꼽힐 정도다. 텔레비전에 비친 그의 모습에 반한 팬들이 생길 정도였다. 월스트리트의 애널리스트들은 “리먼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는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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