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 칼럼

‘위대한 직접 민주주의’의 그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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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촛불집회에 몇 차례 나갔었다. 하루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밤새 시위대를 지켜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누가 지시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화딱지’가 나서 뛰쳐나온 것 같았다. 애초에 광우병 괴담의 불을 지른 방송프로가 진실이냐 과장이냐를 따지는 건 별 의미도 없는 듯했다. 광우병은 도화선일 뿐이고, 그 뿌리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열받아 뛰어나온 사람들은 때때로 격렬한 시위를 했지만 거기에선 축제도 많이 열렸다. 차량 통행이 끊긴 서울 한복판 태평로에서 사람들은 토론을 하고, 술도 마시고, 춤도 췄다.

어떤 남자는 북소리에 맞춰 “이야∼” 하고 고함지르며 춤추는 퍼포먼스를 했다. 나도 즐거워하며 한참 봤다. 중간중간 “이명박은 물러가라” “조중동은 폐간하라”는 고함이 터질 때야 비로소 ‘아, 이게 축제가 아니라 시위지’하는 자각을 했다. 10여 명씩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며 얘기하는 젊은이의 모습은 여기저기서 항상 보였다. 다른 한쪽에선 고등학생부터 공기업 사람들까지 자유발언대 단상에 올라가 정부 정책을 격렬히 성토했다.

‘축제와 시위의 결합이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겠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도로를 점거했고, 대낮이 아니라 새벽녘이고, 토론에서 반대 주장은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라는 것말고는 괜찮아 보였다. 하긴 브라질 리우 축제 때도 길은 다 막히지 않는가.

 촛불집회에 어린애들을 데려간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시위가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어느 부모도 자식을 데려가진 않을 것이다. 시위는 간혹 격렬했지만 대부분 새벽녘에 청와대로 행진하려다 경찰과 충돌한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분노했으면 애들까지 데려왔겠느냐”며 정당성을 강변하거나 “애들을 그런데 끌고가는 게 정상이냐”고 분개하는 것 모두가 부분적인 진실에 불과할 것 같다.

이번 촛불시위에 대해선 진보 진영에서 수많은 찬사가 나왔다. 그중에서도 ‘위대한 직접민주주의’라는 표현이 가장 멋져 보인다. 정치인·교수들이 그런 얘기하는 걸 들었다. 그런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알리는 새로운 형식의 민주주의가 등장한 것 같다. 하지만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있는 법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도 있다는 걸 분명히 지적해야겠다.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거의 매일 회사에 전화를 걸어와 조중동에 광고를 주지말고 XX와 OO 신문사로 돌리라고 협박한다. 쇠고기 파문과 관련해 국민건강권을 외치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 문제와 아무 관계도 없는 기업들에 생떼를 쓰는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다. 광고는 중요한 기업활동의 일부인데 이런 협박은 범죄 아니냐.”

중앙일보에 걸려온 수많은 하소연 중 하나다.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제약·제빵, 신발과 의류, 식품은 물론 심지어 금융업까지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얘길 듣자면 ‘우리가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게 맞나’하는 느낌이 든다.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 욕부터 한다. 그런 다음 조중동에 광고 내면 가만 안 있겠다면서 XX와 OO에 광고를 하라고 한다. 기업 입장에선 소비자의 불만전화 한 통만 받아도 신경쓰인다. 조직적으로 전화를 건다는 건 알지만 몇십 통 받으면 정말 무섭다. 촛불집회가 이런 식으로 악용되는 게 기가 막힌다.” 그렇다. 위대한 직접민주주의는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에서 시작된 ‘촛불 민주주의’는 이제 다른쪽으로 성장하는 조짐도 보이고 있다.

촛불시위대는 11일부터 KBS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정부의 방송 장악 저지’가 목표라고 한다. 퇴진 압력에 시달려온 KBS 정연주 사장에겐 강력한 지원군이 생긴 셈이다.

신도 부러워한다는 공기업도 총력전을 펴고 있다. 방만한 경영으로 세금만 낭비한다는 비난에 몸조심하던 공기업들은 신문에 공개적으로 반박 광고를 내고, 시위현장에서 촛불 민주주의에 호소하면서 되살아나고 있다. 직접민주주의에선 일사불란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렇다면 조직원을 시위현장에 동원하는 게 가능한 민노총·전교조 등이 이런 직접민주주의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런 독특한 직접민주주의가 과연 세계사의 흐름에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우리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고개가 갸우뚱해지지만 글쎄, 좀 더 지켜보자.

김종혁 사회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