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때와 비슷해 공기업 개혁 미룬다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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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左>이 12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현재의 경제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조용철 기자]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11일 공기업 민영화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이유로 최근 경제 상황을 들었다. 최근 거시경제 지표가 1997년 외환위기 때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정말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와 같은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일까.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12일 다른 견해를 밝혔다. 이 총재는 “외환위기 때는 대기업의 부채비율이 400%에 이르고, 은행과 유사 금융회사들이 외국에서 돈을 빌려 동남아에 투자했고, 경상수지 적자가 우리 경제 규모에 비해 갑자기 커졌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그때와 다른 점이 많으며 올해 경상수지 적자가 나더라도 경제 규모로 봤을 때 큰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 총재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유가 급등으로 3차 오일쇼크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국제수지와 외환보유액 관리를 잘못하면 위기가 커질 위험성은 상존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닮은 점과 다른 점=외환위기의 주범 중 하나는 경상수지 적자였다. 1996년 경상수지 적자는 237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단기외채도 가파르게 늘어 96년 말 총외채 가운데 48.2%나 됐다. 최근 경상수지 적자와 단기외채가 크게 늘어나는 것은 외환위기 전후와 비슷하다. 올 들어 경상수지는 벌써 70억 달러 적자를 냈다. 단기외채도 지난해 말에 이미 40%를 훌쩍 넘었다.

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가장 큰 차이는 외환보유액이다. 외환위기 당시엔 외환보유액이 경상수지 적자와 외채를 메우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그것이 위기의 도화선이 됐다. 지금은 외환보유액이 2582억 달러로 단기외채의 1.6배를 넘는다. 외환시장을 안정시킬 ‘실탄’이 넉넉한 편이다. 이 총재의 지적처럼 기업과 금융의 건전성도 사뭇 다르다. 지난해 말 우리 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은 106.5%였다. 제조업 강국인 일본(205.2%)보다 훨씬 낮다. 오히려 기업들이 현금을 쌓아놓고 투자를 안 하는 게 더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재정부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는 기업과 금융회사의 거품이 문제였지만, 10년간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그런 거품이 많이 제거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맘 놓고 있을 처지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특히 외환시장 개입은 어려움을 낳을 수 있다. 이 정부 초기에는 원화 환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더니 최근에는 환율 상승을 억제하려고 외환보유액을 털어 시장에 개입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외환 당국이 환율 상승을 막는 행태는 외환위기 때와 비슷하다.

외환 당국 관계자는 “환율을 내려서라도 물가를 잡으라는 요구가 워낙 강해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코노미스트는 “4, 5월 외환보유액이 약 60억 달러나 줄었다”며 “환율 상승을 막으려고 시장에 달러를 내다판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 이후 우리 금융회사들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돈 빌리기가 어려워진 점도 찜찜하다. 은행들은 최근 몇 년간 조선업의 선물환 거래에 응하기 위해 단기로 달러를 대거 빌렸기 때문에 어떻게든 달러를 조달해야 할 형편이다. 은행들이 국제 시장에서 달러를 구하지 못하면 최종적으로는 한국은행이 외환보유액을 시장에 풀어야 한다.

◇임 의장 왜 이런 발언했나=임 의장은 경제관료(행정고시 24회) 출신으로 한나라당의 대표적인 경제통이다. 경상수지가 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남달리 심각할 수 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유가가 급등하고 대외여건이 불안한 가운데 정부가 민생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통합민주당 최인기 정책위의장은 “야당에 국회 등원을 압박하고 ‘쇠고기 국면’을 전환하는 동시에 법에도 어긋나는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위기론을 퍼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임 의장이 현 경제팀과 경제정책의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정작 임 의장은 자신의 발언이 크게 보도되자 당황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임 의장이 청와대에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해명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임 의장은 12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위기론의 근거를 다시 설명하면서 ‘외환위기’라는 대목은 뺐다.

글=이상렬·남궁욱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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