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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상생의 바둑도 수용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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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초반에 매번 대마를 죽이고도 놀라운 승부호흡과 심리전으로 마법 같은 역전을 일궈내는 이세돌 9단. 그러나 이런 식은 오래갈 수 없다는 게 선배 고수들의 충고다.

“재미있다. 통쾌하다. 이세돌 바둑을 보고 있으면 속이 다 후련해진다.”

“시종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하다. 그러다 벌어지는 마술 같은 역전극은 한편의 드라마다.”

팬들은 이세돌 9단의 바둑을 보며 열광한다. 구사일생의 스토리와 측량불가의 묘수, 피로 물든 판, 살쾡이의 날카로움에 귀신 같은 승부감각, 그 현란함에 몸서리를 친다. 나이 어린 프로 지망생들도 대부분 이세돌 9단의 전투 바둑을 닮고 싶어한다. 2008년도 세계 최강자 이세돌. 그는 이미 올해 끝난 3개 세계대회를 모두 석권했으니 누가 그의 바둑에 토를 달 수 있으랴. 하지만 최근 두어진 이세돌 바둑은 한 가닥 물음표를 분명히 남긴다. 서봉수 9단이 던진 한마디 질문이 핵심을 찌르고 있다. “이세돌 바둑은 왜 매번 초반에 다 죽지?”

4월 30일 벌어진 응씨배 세계선수권 1회전. 상대는 중국의 후야오위 8단. 이세돌은 초반부터 대마가 쫓기다가 150수를 넘기면서 기어이 대마가 잡혔다. 그러나 이후 예의 눈부신 수법으로 판을 뒤흔들어 기어이 역전승을 거뒀다.

이어서 5월 4일 벌어진 쿵제 7단(중국)과의 8강전에선 아예 초반에 대마가 죽어버렸다. 누가 봐도 회생 불능이었지만 판이 끝났을 때는 무려 11집반을 이기고 있었다. 6월 5일 일본의 장쉬 9단과의 LG배 세계기왕전은 끝없는 혈전 속에서 생사가 덧없이 반복되면서 필패의 형국으로 빠져들었으나 막판에 극적으로 뒤집어 역전승. 그러나 6월 7일 벌어진 중국 최강자 구리 9단과의 후지쓰배 세계선수권에선 무려 34개의 초대형 대마가 잡히면서 바둑도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이세돌 바둑은 확실히 ‘죽음’과 맞닿아 있다. 타협은 없다. 초반은 대개 불리하게 출발한다. 그러고는 내가 아니면 네가 죽는 생사의 갈림길이 연이어 연출되다가 극적인 역전승으로 막을 내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며 그런 역전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유창혁 9단은 “한동안 안정적으로 변하는듯하더니 요즘엔 더 사나워졌다. 대마를 죽이고도 이기는 것은 상대를 자극하는 능력이랄까, 발군의 승부호흡 덕분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식은 날이 서있을 때는 통하지만 한번 꺾이기 시작하면 큰 위기를 맞게 된다”고 말한다. “승부는 강한데 포석이 약한 것은 어린 시절 기보 연구보다는 실전 위주의 공부 탓”으로 분석하며 “아직 나이가 있으니 정상을 지키기 위해선 노력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이세돌 9단과 가장 비슷한 유형으로 꼽히는 조훈현 9단은 대마가 거듭 죽는 이유를 “피로 탓”으로 돌린다. 스케줄이 너무 꽉 차있어 몸이 못 따라가는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바둑을 망해놓고도 거듭 이겨내는 것에 대해선 “확률적으로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실력임엔 분명하지만 기세가 충만하고 운이 따라주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몸 관리, 스케줄 관리를 해야 한다. 이런 식은 결코 오래 못 간다. 지금은 상대가 실수해 주니까 가능하지만 내가 실수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나. 한번 꺾이면 내리막 길은 끝이 없고 복귀는 매우 어려운 법이다”고 충고한다.

바둑은 ‘상생(相生)의 도’이고 ‘조화(調和)와 타협의 미학’이다. 그게 예부터 알려진 고수의 길이고 왕도다. 이세돌 9단이 반드시 유의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이세돌 9단은 아수라를 연상케 하는 전혀 다른 유형, 즉 패도의 바둑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있다. 죽음과 핏빛으로 물든 이세돌 바둑은 아직도 진화 중인 것일까.

박치문 전문기자

◇응씨배 세계선수권 1회전 백 이세돌 9단 흑 후야오위 8단=우변 대마는 간신히 살았으나 흑1, 3의 패를 당해 그 대가로 하변 대마가 잡혔고 형세는 대불리. 그러나 이후 이세돌 9단은 상변 접전에서 묘수 한 방으로 바둑을 역전시킨다. 후야오위가 시간 초과로 벌점을 6집이나 당하는 바람에 1집 지고도 5집을 이긴다.

◇응씨배 세계선수권 3회전 백 이세돌 9단 흑 쿵제 7단=좌변 대마가 위태로운데도 이세돌 9단은 태연히 백1로 우변을 벌리고 있다. 순간 백대마는 흑2, 4의 수순으로 간단히 잡혀버린다. 흑 수십 집 우세. 그러나 이 판은 쿵제가 너무 떨다가 무려 11집반 차로 지고 만다. 10으로 A에 두었으면 화타가 와도 회생 불능이었다는 평.

◇후지쓰배 세계선수권 8강전 백 이세돌 9단 흑 구리 9단=이 판도 초반에 무리를 하는 바람에 시종일관 쫓겼고 고전이 이어졌다. 실리가 부족한 백은 대마의 생사를 외면하고 집을 챙겼으나 구리는 중국 최강자답게 8~14까지 정확한 수순으로 거대한 백 대마의 명맥을 끊었다. 너무 큰 대마가 막판에 죽어 역전 기회가 없었던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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