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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를열며>出世間的인 恨삭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5.16과 12.12가 똑같이 쿠데타로 규정되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자를 덜 나쁘게 생각한다.왜 그럴까.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나는 5.16을 무혈(無血)쿠데타로,12.12를 유혈(流血)쿠데타로 기억한다.12.12는 그 반란 과정에서 피흘림이 있었고 5.18을 전후로 해 광주지역에서도 엄청난 시민 살상이 있었다.산모(産母)에게 총격을 가해 뱃속의 태아가 불거져나오게 했다는 것,여학생들의 가슴을 대검으로 상하게 했다는 것,수영하는 어린이들을 사살했다는 것 등의 끔찍한 만행들을 많이 들었지만 여기서 더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다.
우리 민족은 한(恨)이 많다.한이란 무엇인가.억울함을 당할 때 그것을 물리칠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그 부당함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겁먹은 우리는 저 극악무도(極惡無道)한 5.18 난행(亂 行)을 가슴 속에 한으로 간직해두어야만 했다.
맺힌 한을 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불교에서 보면 한을 처리하는데 두 단계가 있다.「진상규명」이라든지,「역사 바로 세우기」등의 형상적인 것은 세간법적(世間法的)인 「한풀이」고,한 단계 더 깊이 인간 존재의 뿌리로 돌 아가 그 한이라는 것이 인간 무명(無明)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출세간적(出世間的)인 「한삭임」이다.세간법적인 한풀이는 아무리 잘된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허전함을 주는 한계가 있고,출세간적인 한삭임은 우회로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평화를주면서 세간적인 한의 근원을 없애 버린다.
한풀이가 인간의 몇몇 동작만을 떼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한삭임은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이다.한풀이가 나무나 숲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한삭임은 우주의 이루어짐과 부서짐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다.한풀이가 육체 적인 형상에집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한삭임은 그 집착이 부질없음을 깨닫는것이다. 한을 삭이려면 세상만사의 무상(無常)을 꿰뚫어보아야 한다.사람은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한다.마신 공기는 토해내야 하고,받은 에너지는 되돌려보내야 한다.돈과 권력과 명예도봄꿈처럼 부서진다.
우리는 지난 16년 사이에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오르다가 미끄러져내린 이들이 펼쳐준 생동감 넘치는 무상극(無常劇)을 잘 보았다.텔레비전 방송 드라마 속에서 하늘을 찌를 패기로 당당하게 설치던 인물들을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볼 수 있었다.이번 「잘못된 과거 청산」작업의 가장 큰 공로는국민이 인생무상을 현장 실습하듯 잘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것이다. 권력의 단맛과 쓴맛을 충분히 보았고 무상을 철저하게 느꼈다면 5.18 가해자들은 또다시 구차한 변명이나 논리를 꾸미기 위해 헐떡거리지 않을 것이다.권력 승계가 달리 되었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하거나 권력승계자가 배신했다고 억 울해하기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어떤 개인이 마음대로 주고받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현재의 권력자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물로 삼는다고 의심하거나 속상해하기보다 어떤 시대,어떤 사람에게 묻더라도 광주의 살상은 죄가 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할 것이다.악업(惡業)을 금생(今生)에 조금이라도 더 녹이고 갈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준 이에게 감사할 것이다.무상을 깨닫을 때 원망이 사라지고 진실한 참회의 마음이 생긴다.
우리가 저 5.18 가해자들의 살상행위만을 잘라 보면 증오가생긴다.그러나 저들 일생의 파노라마를 한마당의 춘몽극(春夢劇)으로 연결시켜 보면 원망과 미움이 아닌 아픔과 슬픔이 생긴다.
이 슬픔의 관찰에 의해서만 우리의 한은 제대로 녹을 수 있다.
(청계사 주지) 釋之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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