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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35. 대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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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고 있는 1950년대 기차.

'프랑스에 가고 싶어도 너무나 멀다. 새 양복이나 입고 먼 여행길에 떠나볼까나. 기차가 산마루를 달릴 때 나 혼자 즐거운 생각에 잠기리라'.

오기하라 사쿠다로(荻原朔太郞)의 시다. 육민관에 가기 위해 원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즐거운 추억이 뭐 있었는가. '죄(罪)와 벌(罰)'이 문득문득 생각난다.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KURK) 통역으로 있는 박승찬(朴勝璨)이 언젠가 찾아와 대뜸 "운사, 장가 안 들어? 우리 처제가 이화여대 체육과에 다니는데 귀엽게 생겼어." 나는 대답을 보류했다. 연상의 여인에게 혼을 빼앗기고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구평회(具平會)가 내 손을 끌고 대청동에 있는 한국은행에 간 적이 있다. 혼담이 오가는데 한번 봐달라는 것이었다. 많은 직원이 와글거리는데 중앙을 가리키며 "저기 저 여자!"하는데 그 여자가 잠깐 일어섰다.

"빼어난 미인 아닌가. 너한테는 과분할 것 같다."

"정말 그렇게 보이나?"

그 결혼식을 우리 홀에서 치렀다. 락희(樂喜) 화학공업사가 락희유지로 발전하는 과정이었다. 한국 최초로 플라스틱 머리빗을 만들고 칫솔과 치약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큰 형님 구인회(具仁會)씨의 민완(敏腕)이 번쩍이던 시대다. 큰 홀, 큰 테이블마다 고급 중국요리를 왕창 차려냈다. 하객들은 배불리 먹고 즐겁게 담소했다. 그 시대에 그런 스케일로 피로연을 한 사람은 없었으리라.

예과 동기들의 소식은 여러가지였다. 학생회장을 하며 이목을 끌었던 최덕환(崔德煥)은 한국전쟁 전에 일본 규슈(九州)제대로 밀항을 했고, 제주 한림 출신의 고학능(高學能)도 같이 갔단다. 한영철(韓永哲).윤억현(尹億鉉)은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소식이 끊겼고, 역시 의용군으로 잡혀간 안현우(安賢祐)는 평북 순안의 산속 인민군 부대에서 몰래 탈출해 미군 트럭으로 달려가 영어로 "헬프 미!"를 외쳐 가며 부산까지 내려와 내 소식을 듣고 달려 왔다. 그런데 그의 소망은 밀항으로라도 일본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큰 돈을 주고 밀선에 탔는데 날이 훤히 밝아오자 산이 보이기에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우마야마겐"이라고 하더란다. 마산현(馬山縣)이라고 익살을 부린 것이다.

광복동에 황가(皇家)라는 찻집이 있었다. 지아이(GI) 클럽을 겸하고 있어 문화인들이 거기 몰려 왔다. 일본에서 유명한 김소운(金素雲)씨도 만났다. 일본말을 일본 사람보다 더 잘 한다고 했다. '조선 민요집(朝鮮民謠集)'같은 것은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이 분한테 200달러인가를 꿔주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범일동 산꼭대기에 창고 같은 건물을 지어 동아대라는 것을 시작했다는 신경희(辛景熙). 너한테는 무수한 신세만 졌구나. 전생부터 그런 인연인가 보다. 홍태조야, 너한테는 죽을 죄를 졌구나.

기차가 긴 굴로 들어갔다. 치악산 또아리굴이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모든 과거여, 내 몸 안에 머물지 말고 모두 떠나다오. 제발! 깨끗이 떠나다오.

눈 앞이 환하게 밝아왔다. 나는 광활하게 펼쳐진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신천지로구나!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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