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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향기] 조건없는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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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면

위암 수술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원인 모를 배앓이를 하고 있다. 걸을 수도 없고, 밥을 먹으면 왼쪽 배가 끊어질듯 아프면서 고통이 연속된다. 여러 검사와 환부 주위의 정밀검사를 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왜 통증이 찾아 오는지. 장유착.장염 등 이상징후를 보이지만 뚜렷한 처방도 할 수 없는 처지다. 급한 마음에 통증이 오면 다시 배를 째 유착된 장을 내 손으로라도 떼놓고 싶을 정도다. 그토록 시도 때도 없이 통증이 나를 괴롭힌다.

문제는 가족들이다. 나때문에 단란한 가정이 허물어지고 삭막해져가는 것이 안타깝기에 말이다. 처는 처대로 먹고 살기 위해 식당일을 해야 하고 애들은 학업에 매진해야 할 텐데 나 때문에 제 일들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는 정말 상심이 크신 모양이다. 어머니와 막내까지 먼저 여의신 아버지로선 장남인 내가 이러니 정말 답답하실 것이다. 그래도 내색 한번 안 하시며 "애비야, 힘내거라"를 반복하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설거지며 방청소, 상 차리기 등 이 모든 것을 연로하신 아버님이 도맡아 하고 있다. 예전같으면 물 한방울 안 묻히시게 했지만 지금은 내가 오히려 아버지께 의탁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같은 불효가 또 어디 있을까. 80이 다 되신 아버님한테 50 넘은 못난 놈이 간병에 밥까지 얻어먹다니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나대로 치료를 하고 있지만 아버지는 백방으로 찾아다니시며 배앓이에 좋다는 것을 구해오신다. 인삼이며 녹용이며, 산성수에 알칼리수까지…. 효용이야 어떻든 체질에 따라 먹어야 되는데도 혹시나 하는 맘으로 강권하다시피 떠 먹인다. 내키지 않지만 아버님의 정성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지를 뜬금없이 불러보고 싶다. 아버지 뒷모습이 측은해 보여 더 부르게 된다. 사실 아버지는 연로하실 뿐 아니라 갖가지 병을 지닌 종합병원이다. 고혈압에다 당뇨.관절염.간염 등 이 모든 걸 내가 챙겨도 시원치 않은데 당장의 나만을 생각하신다. 당신은 걸어다닐 수 있기에 괜찮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과연 내가 그 분을 위해 해드릴 것이 무엇인가.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하나뿐인 나를 바라보며 사시는 분인데 이렇게 약골이며 병중이니 누구에게 하소연하실까.

정말 나는 불효자다. 빨리 회복하는 길만이 효도하는 길인데 맘같이 되지 않아 답답할 뿐이다. 하루하루 당신 얼굴에 깊이 파이는 주름살과 야윈 턱주변을 보면 맘이 아리다. 내가 만일 아버님 입장이라면 당신을 위해 그렇게까지 정성스레 할지 난 자신이 없다.

애들 엄마한테도 정말 무능한 남편이어서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사업이라 벌여놓고 내가 빠지니 예상외로 일이 힘든 것은 불문가지. 그래도 묵묵히 쓰러지지 않고 해나가는 걸 보면 가냘프기만한 처는 나보단 강하고 유능하다. 이 모든 시련이 한때의 추억이었으면 좋으련만 고통의 시간이 너무 길다.

아버님과 처 그리고 애들, 이 사람들 때문에 사실 오늘 이 자리를 버티고 있는 줄 모른다. 하늘 같은 아버지의 깊은 뜻, 내 아픔을 반이라도 가지려는 아내의 사랑 때문에 오늘을 산다. 이 자리를 빌려 아버님께 감사드리며, 아내에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불효자인 아들이자 남편이.

이혁진(50세.서울 종로구 낙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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