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레스턴 없는 미국언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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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의 뉴 리퍼블릭 편집인이며 텔레비전 시사해설가인 모튼 콘드레키는 젊은 기자시절 제임스 레스턴의 사진을 호주머니에 넣고다녔다.레스턴 같은 기자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많은 기자들과 기자지망생들이 콘드레키와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86세를 일기로 장장 반세기에 걸친 「무관의 제왕」으로서의 생애를 마친 레스턴은 미국 언론계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취재기자였고 가장 영향력있는 칼럼니스트였다.
1939년9월1일 히틀러의 나치스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해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참으로 역사적인 날에 런던에서 뉴욕타임스의 기자가 된 그는 평생동안 『근면하고 겸손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랐다.그가 터뜨린 수많은 세기적 특종들은 그의 이런 생활태도 속에 이미 약속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레스턴의 부음을 들으니 워싱턴특파원 시절 내가 키신저의 뉴스브리핑 같은데서 맨 뒷자리에 앉아 손바닥안에 드는 작은 수첩에가끔 몇자씩 적곤하던 그 은발 홍안(紅顔)의 「대기자」에게 자주 정신팔던 기억이 새롭다.
그는 취재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발로 뛰는 칼럼니스트로 일관했고,특히 전세계의 뉴스 소스를 상대로 하는 그의 전화취재는 워싱턴에서는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레스턴은 후배기자들에게 세가지를 당부했다.첫째는 뉴스를 권력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에서 찾으라는 것이다.거물들보다 하급자들이 정보를 잘 흘린다.둘째는 사교계 행사에 자주 나가는 것은 기자의 위상을 높여주는 것 말고는 소득이 없다는 것이다.셋째는기자는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지 말라다.그러나 레스턴 자신은 본의 아니게 이 세번째의 충고를 지키는데 실패했다.그의기사와 칼럼은 자주 그가 피하려고 하던 영향력을 발휘했다.프랭클린 루스벨트 이래 10명의 대통 령들이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으니까.
그는 1971년 닉슨보다 앞서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만났다.중국방문이 끝날 무렵 그는 급성맹장염에 걸렸다.
침술로 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고는 병상에서 「내가 베이징에서 받은 수술」이라는 기사를 송고했다.그가 중국을 떠 난뒤 병원당국은 레스턴이 잊고 간 양말 한짝을 발견해 우편으로 레스턴에게보내 주었다.사람들은 그 일화를 「레스턴의 양말외교」라고 불렀다. 나는 워싱턴에 있는 동안 레스턴을 세번 만났다.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테이블위에 펼쳐놓은 자료들에 까뭇까뭇한 성냥꼬투리의 흔적이 많이 나 있는 것이다.처칠이시가를 입에서 떼지 않았듯이 레스턴은 언제나 파이프 를 물고 지냈다. 그는 필요없는 말은 일절 삼가고 언제나 본론을 재촉했고,그의 통찰력은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냉소주의자들의 세계에서 레스턴은 이상주의자로 일관했다고 말한 뉴욕타임스의 애플기자의 말이 실감나는 분위기를 풍겼다.빅토리아 왕조시대의 가 치관이 몸에 밴 그의 언행은 자로 잰듯 반듯했다.사고는 언제나 온건했다. 그의 언론관은 이성(理性)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60년대말에서 70년대 중반 사이 미국 언론이 베트남전쟁의보도를 놓고 객관보도냐,반전(反戰)시각의 주관보도냐는 큰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레스턴은 결연히 기사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객관적일 수 있다는 입장에 섰다.그런 의미에서 그의 지적(知的)자세는 근대적 합리주의를 딛고 있었다.
그가 상류사회의 별장이 있는 매사추세츠의 마타스 빈야드(Martha's Vineyard)라는 작은 섬의 부수 5,000의지역신문 빈야드 가제트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됐을 때 그것을사재(私財)로 인수한 데서도 크고 작고간에 신 문에 대한 그의애정이 잘 보인다.그래서 특히 언론인들에게 그의 죽음은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해리슨 솔즈베리까지 가고 없는 지금 월터 리프먼이후 레스턴이 보여주던 롤 모델(role model)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국제문제 대기자)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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