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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랑방>全.盧씨와 뭉개진 시인의 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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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영화의 귀재(鬼才)」로 통하는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이며칠전 한국을 다녀갔다.그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에게 있어 꿈은 무엇보다 소중하다.나는 늘 꿈을 꾸며,그 꿈의 내용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평범한 이야기지만 예술가에게 있어 꿈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꿈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던 예술가들은 많다.대표적인 경우가 19세기 영국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다.그의 대표작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본래 『여행의 동반자』라는 제목의 짧은 단편으로 쓰였었다.이 작품이 몇몇 출판사에서 퇴짜 를 받고난 후 스티븐슨은 자신의 능력에 회의를 느끼고 상심에 빠졌다.그러다 어느날 밤 잠을 자던 중 그는 단편소설 속의 이야기가 전혀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돼 가는 꿈을 꾸었다.기이한 드라마였다.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스티븐슨은 꿈속 의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꿈을 꾸는 것도,그 꿈을 작품화하는 것도 예술가들의 특권임은두말할 나위 없다.하늘조차도 막지 못한다.하지만 이따금 예술가들의 꿈이 짓밟히고 뭉개지는 경우가 있다.정치와 권력이 주범이다.문화예술에 대한 탄압의 형태로 자행되기도 하 지만 때로는 물리적 폭력으로 예술가들을 핍박하기도 한다.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정치,그런 권력일수록 언젠가는 반드시 응징받도록 되어있다는점이다.하늘은 언제나 옳은 자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저들이 내 꿈을 짓밟았다.꿈속에서라도 저들이 패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81년 5월말 소설가 한수산(韓水山)필화사건에 얽혀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시름시름 앓다 88년 10월 42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 박정만(朴正萬)시인은 죽기 전 이렇게 곱씹었다.
필화사건이라고는 하지만 필화사건일 수 없는 필화사건이었다.당시 중앙일보에 『욕망의 거리』라는 소설을 연재하던 한수산이 소설 속에서 대통령 전두환(全斗煥)씨로 암시되는 인물을 희화화(戱畵化)했다는 것이 이유였다.문인.언론인등 7명이 끌려가 2박3일 내지 4박5일간 초죽음이 되도록 고문을 당했는데,중요한 것은 그들 7명중 서너명은 사건과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점이다. 박정만의 경우 평소 한수산과 가까이 지냈다는 것이 이유였으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던 셈이다.후에 들으니 한수산의 소설은 단지 빌미에 불과했고,몇몇 문인과 언론인을 혼내줌으로써 문단과 언론계에 군사정권의 막강한 힘을 과시해 보 이려는 의도였다던가.
그때의 보안사령관이 노태우(盧泰愚)씨였다.쓸데없는 얘기지만 全씨나 盧씨가 문화예술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가 있었던들,아니 시 한편 소설 한편이라도 제대로 읽었던들 문화예술인들을 그런 식으로 모질게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설혹 소설 속에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나온다 하더라도 웃어넘기는 아량을 가졌을는지도 모른다.예의 필화사건은 접어두더라도 만약 그들이 문화예술을 사랑했다면 지금에 이르러 철창에 갇히거나 중형(重刑)을 눈앞에 두고 전전긍긍해하는 처지가 되지는 않 았으리라 확신한다.
한수산은 『하늘이 용서해도 나는 용서하지 못한다』고 누누이 되뇌었지만 당시 필화사건 당사자의 한사람으로 그들이 광주학살을비롯한 온갖 악행(惡行)에 대해 마땅한 응징을 받고 있다거나 『속이 후련하다』는 따위의 감정을 털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全-盧씨와 한수산 필화사건은 정치권력과 문화예술의 상관관계에 있어 하나의 교훈이 될 수도 있다.문화예술을 이해하는 것은 곧 양심이며 양식(良識)이기 때문에 권력이 크면클수록 정비례해 그 이해도(理解度)도 높아야 하 는 것이다.그런 점에서라도 정치나 권력에 의해 예술가들의 꿈이 짓밟히는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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