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임동혁표’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 출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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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시작은 편안했다. 5일 시판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EMI)에서 피아니스트 임동혁(24·사진)은 느린 속도로 아리아를 열었다. 피아니스트들은 이 변주곡의 첫 곡인 아리아에서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23세에는 속사포처럼, 49세에는 여유롭게 아리아를 연주해 세월을 전달했다. 임동혁은 충분히 노래하는 쪽을 택했다. 화음의 울림을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아리아를 끝낸 그가 갑자기 힘을 낸다. 1번 변주는 당김음을 특히 강조하며 혈기 넘치는 해석을 예고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빠른 음표로 피아니스트의 기를 죽이는 5번 변주는 자로 잰듯 정확한 테크닉으로 해치웠다. 10번 변주에서 건반을 끝까지 눌렀다가 떼며 내는 소리가 용감하다. 모든 변주 사이는 쉼없이 흘러간다.

바흐 시대의 음악에는 피아니스트의 재량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 현재의 피아노와 달리 당시에는 음을 인위적으로 이을 수 있는 페달이 없었다. 건반도 소리를 부드럽게 이어서 낼 수 없었다. 임동혁은 대부분의 변주에서 소리를 톡톡 끊어 분명하게 내는 해석을 선택했다. 스타카토가 강조돼 타자기 두드리듯 리드미컬한 소리가 나왔다.

굴드를 비롯해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로잘린 투렉, 머레이 페라이어 등 수많은 대가가 골드베르크 명반을 남겼다. 이 작품은 한 피아니스트의 완성된 세계를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24세 임동혁의 도전적이고 날카로운 해석은 이전 해석과 비교했을 때 논쟁을 부를 소지가 있다. 하지만 피아노 음악의 고전이 젊고 싱싱한 손가락을 만나 생명력을 얻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완벽한 손놀림으로 연주한 부분은 다분히 차가운 인상을 준다. 임동혁은 영리하게 완충지대를 마련했다. 7, 13, 15번 등 느린 변주에서 힘을 빼고 해석을 많이 넣지 않은 것이다.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음악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모양새다. 게다가 음색을 바꿔 쉰 목소리로 노래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덕분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시종일관 넘치는 박진감이 조금 누그러든다.

롱티보 콩쿠르 최연소 1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3위 수상 거부, 쇼팽 콩쿠르에서 형(임동민·28)과 함께 공동 3위 등 임동혁에게 붙었던 꼬리표는 콩쿠르와 관련한 화제였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아카데믹한 바흐를 들고 나선 것이 올해 2월이다. 한국 12개 도시를 돌며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한 후 4월 영국에서 사흘 동안 음반을 만들었다. 콩쿠르 입상자가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도 청중과 만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녹아 있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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