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초저녁의 커피 숍은 조용했다.데이트 남녀 한쌍만이 긴 의자에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마주보지 않고 나란히 한 방향을 보며 앉아있는 품이 더욱 연인다웠다.
사랑이란 어쩌면 「서로를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을 함께 바라다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슬람풍의 모자이크 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하늘색과 검정 벽돌색과 하양.당초(唐草)문양을 얽어 아로새긴 그 타일 벽은 신비로운 이국(異國)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리영은 이 작은 커피 숍을 좋아했다.경복궁 돌담 건너에 돌아앉듯 호젓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좋았고,이슬람풍의 장식과 로코코풍의 가구가 널찍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무늬천 의자라든가,유려한 곡선 조각의 탁자라든가…,18세기 프랑스의 로코코 미술풍으로 우아한 공간이 연출되어 있는 것이다.
콧수염의 사나이가 급히 들어왔다.올리브색 반소매 사파리 룩의미스터 조-.
아리영을 발견하고는 안심한 듯 털썩 마주앉는다.
『웬 여름바람이지?』 여전히 냉소적이다.근엄한 콧수염에 어울리지 않는 그 말투가 우스웠다.
『왜 콧수염을 길렀어요?』 『면도하기 귀찮아서….』 좀 무안한 듯 손바닥으로 콧수염을 문질렀다.코 밑 한가운데에만 기른 수염이다.
『콧수염을 일본말로 뭐라 하는지 아셔요?』 『모르겠는데.』 『조비 히게(ちょび ひげ).「좁은 비게」라는 뜻의 우리 옛말 「좁이 비게」가 일본에 가서 조비 히게가 됐대요.』 『비게?』『비는 게….「베는 털」이라는 뜻이래요.「베다」의 옛말이 「비다」「버이다」고,「털」의 옛말이 「게」.그러니까 수염은 원래 깎아야 하는 것,베야 하는 것인 셈이지요.』 『어째,서여사한테서 전수(傳授)받은 것 같군.』 미스터 조는 서여사를 경원(敬遠)하는 눈치다.
아리영은 콧수염을 지켜봤다.
「면도하기 귀찮아서」라는 말같지 않게 깨끗이 손질한 흔적이 엿보였다.
아리영의 육신은 저 콧수염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젖가슴에서하반신으로 훑어내려가던 깔끔거리는 애무.
그 쾌감의 줄기가 아리영의 늪에 이른다면… 까무라칠 것만 같을 진한 감촉이 두려워 그의 침실에서 탈출이라도 하듯 뛰쳐나왔던 것은 아닐까.정길례 여사네 잔칫날 저녁의 일이 돌이켜진다.
글 이영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