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스살롱>중남미문화원장 부인 홍갑표 여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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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통일로에서 의정부쪽으로 꺾어져 달리자면 자칫 놓치기 쉬운 작은 표지판이 좌회전을 지시한다.이를 따라 주택가로 들어서면 보물찾기라도 하듯 「중남미문화원 200」「중남미문화원 80」「중남미문화원 50」하는 이정표가 이어진다.
골목골목을 돌아 마침내 찾은 것은 2,000여평의 대지위에 세워진 벽돌건물.둥근 천장의 중앙홀에 놓인 120년된 피아노를지나 칠레의 타악기 음악이 흘러나오는 널찍한 식당에서는 마침 요리강습 시간이라 한 무리의 주부들이 노란 사프 란 소스를 곁들인 남미식 해물볶음밥 「빠에야」를 맛보고 있다.
『저희 집에 오시면 「눈도 즐겁고,귀도 즐겁고,입도 즐겁다」고들 해요.』 중남미문화원(경기도고양시고양동 소재)의 안주인 홍갑표(洪甲杓.62.중남미문화원이사장)씨의 「내 집」자랑은 조금도 스스럼이 없다.
32년간의 외무부 생활동안 무려 28년을 코스타리카.아르헨티나.도미니카 등 중남미국가에서만 외교관으로 근무한 남편 이복형(李福衡.64.중남미문화원장)씨가 멕시코대사를 끝으로 공직에서은퇴한 것이 지난 93년.평생 재산이라고는 주말 마다 시골의 벼룩시장을 찾아다니면서 하나 둘 모은 2,000여점의 토기.가면.수공예품뿐이었던 이들 부부가 박물관을 꾸미기로 한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박물관 터는 30년전 노후의 전원생활을 꿈꾸며 평당 300원에 사두었던 고양동 땅.
건립비용은 우선 남편의 퇴직금 2억여원을 몽땅 쏟아부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라 농협에 빚을 지고 말았다.『왜 사서고생하느냐』는 주위의 걱정스런 눈길에 아랑곳없이 부부가 벽에 못을 박아 가며 박물관 개관 준비에 온 힘을 바 친 덕에 중남미문화원은 그 해 12월 개관식을 가졌다.『개관 초기에는 이 시골까지 손님이 와줄까 싶어 밤마다 마음을 무척 졸였다』는 洪씨는 『소문에 소문을 듣고 찾아와준 손님들 덕분에 요즘에야 한시름을 놓았다』며 활짝 웃는다.
남편의 첫 외국부임이 67년.외국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던 때라 주위의 부러움을 샀을 법도 하지만 洪씨는 『그동안 고생한 얘기는 소설 열두권을 쓰고도 남는다』고 잘라말한다.코스타리카 공사,마이애미 총영사,도미니카 대사 등 새 로 개설된 영사관에 개척자나 다름없이 부임해 현지관리들과 새로 교제를 트는 일은 물론이고 당시 유신정권과 갈등을 빚던 현지교민을 다독이는 일까지 맡아야 했던 경험을 洪씨는 『대사부인 30년에 배운 거라고는 밥장사』라는 말로 표현한다 .부부라기보다 쾌활한 친구같은 이 내외는 박물관을 두고 『수카사 미카사(내 집은 네집)』라는 스페인말을 인용한다.
중남미문화원 재산으로 등록된 전시관과 전시물의 가치는 곧 구경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뜻.개인사업을 하는 아들 종욱(34)씨는 매달 수입의 10분의 1을 문화원 예산으로 내놓고 온 가족이 일요일마다 입장권 판매 등 노력봉사를 하는 것 으로 그런 부모의 뜻을 물려받고 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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