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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칼럼>언론이 분발할 때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꽃동네」를 운영하는 오웅진(吳雄鎭)신부가 연희동 노태우(盧泰愚)씨 집을 방문한 직후 「대통령 재임때 매달 꽃마을 1천원씩 기부금 인연」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갔다.이를 본 독자들은수천억원 부정축재에 단돈 1천원 기부금이라니 하 고 분노해 마지 않았다.어제 吳신부가 독자기고를 통해 「꽃마을」은 「꽃동네」의 잘못이고 성금은 1천원이 아니라 매달 30만원을 김옥숙(金玉淑)여사가 보내와 합계 740여만원이며 기부금 「인연」운운은 말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20자 제목중 12자가 사실과 틀린 꼴이 돼버렸다.
이현우(李賢雨)前경호실장이 검찰에 1차 소환되어 비자금 조성은 대통령이 직접하고 자신은 심부름만 했다는 기사가 나가자 5,6공 경호실장의 「의리」와 두 전직대통령 내외의 「큰 손」비교를 통해 상대적 우위를 가리는 기사가 줄이어 나 왔다.초록동색으로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을 대비해서 흥미본위의 센세이셔널리즘을 충동질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박계동(朴啓東)의원의 비자금 자료가 공개되면서 신문과 TV는연일 어느 은행,어느 투금에 몇백억원이 숨겨져 있다고 보도했다.보도된 액수만 대충 잡아도 1조원이 넘는데 검찰 조사로는 아직도 본인이 밝힌 5,000억원의 소재 파악마저 제대로 못하고있다.비자금 액수만이 아니라 보도기사를 유심히 읽어보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이라는 전제를 단 기사가 너무 많다.언론 보도가 이렇고 여야 정치인들마저 「설」을 전제로 한 상대방 죽이기발언에 가세하니 독자로선 사실 판단 자체에 믿음이 가질 않는다. 왜 우리는 盧씨 부정축재에 대해 분노하고 수치를 느끼는가.
부도덕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은 나 자신이 부끄럽고 그 부도덕성을 정치적 관행으로 허용했던 군사독재에 대해 분노하기 때문이다.盧씨가 몇평짜리 감방에 있는지,저녁밥을 어떻게 먹었는지에 관심 쏟을게 아니다.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치적 관행을 깨부술 대선자금과 정치자금의 조성.유입과정을 밝히는데 주력해야한다.다시는 이땅에 같은 범죄가 생겨나지 않도록 어두운 정치 관행의 구조적 틀을 들추는 일이다.그 러나 지난 한달을 되돌아보면 우리 언론이 오보와 흥미 본위의 기사,확인되지 않은 기사남발,본말전도의 취재 경쟁에 너무나 열중하고 있다는 자성(自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국언론연구원이 1,000여명의 기자들을 상대로 의식조사를 해 『언론인의 책임과 윤리』라는 책자를 펴냈다.그중 언론의 공정보도를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언론사의 노력부족(27.5%),언론인의 자질부족(25.3%),간부의 간 섭과 통제(21.3%),정부의 간섭과 통제(14.4%)로 나타나 있다.올바른 보도를 하지 못하는 주된 원인이 종래의 외압(外壓)때문이아니라 주로 언론사 내부에 있다는 조사 결과다.필자를 포함한 언론인 스스로의 노력부족과 자질탓이라 는 자기 반성 위에서 전임대통령의 부정축재 사건을 감정과 흥미본위가 아니라 보다 정면으로,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해 우리 언론이 당장 해야 할 일은 대선자금과 정치자금을 솔직히 밝히라고 소리 칠게 아니라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어떤 정치인이 밝히라고 소리친다고 순순히 밝힐 것인가.이를밝혀내는 일은 이제 언론의 몫이다.기자라고 누구 나 워터게이트사건을 폭로했던 워싱턴 포스트지의 보브 우드워드나 칼 번스타인이 될 수는 없다.그러나 진상을 파헤치는 정신이 언론계와 사회전반에 살아 있었기에 다나카(田中)총리의 금맥(金脈)과 인맥을파헤친 다치바나(立花隆)의 개가가 가능했고,닉슨도 손을 든게 아닌가. 대통령 한 사람이 무려 5년동안 5,000억원 이상의부정축재를 가능케 했던 원인을 따져 보면 언론에도 큰 책임이 돌아온다.그가 현직으로 재임했던 시절 지금처럼 언론이 들고 나섰다면 그의 축재가 여기에 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조시대에도 왕의 비리와 잘못을 경계.직언하는 사간원(司諫院)이 있었다.지금 그 역할은 언론에 맡겨져 있다.이 소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생겨났고 지금도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의 비극도 막을 수 없다 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이 절망감을 우리 스스로 해소하지 않고서는 언론은 국민들로부터 영원히 외면당한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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