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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자의 인간 견문록] ‘AI’와 더불어 살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4호 39면

1969년 미국 공중위생국 장관은 “전염병의 시대는 이제 그 막을 내렸다”고 공식 선언을 한 적이 있다. 19세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목숨을 앗아갔던 소아마비·천연두·임질 등에 의한 사망률이 공중위생의 개선과 항생제의 개발로 현저하게 떨어진 데 고무되어 섣부르게 내지른 이 호언장담은 결국 경솔함의 극치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오늘 우리 주변에는 그의 예측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인류는 지금 제2의 전염병 시대를 겪고 있다.

의학 전문가들은 20세기의 의학 발전 중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페니실린 발견을 꼽는다. 페니실린을 비롯한 각종 항생제는 곰팡이가 오랜 세월 박테리아와 전쟁을 하며 고안해낸 화학무기들이다. 특정한 곰팡이가 이른바 공진화(coevolution) 과정을 통해 특정한 박테리아를 상대로 준비한 화학물질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고 그 특정한 종류의 박테리아들에만 독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테리아와 벌인 우리의 전쟁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상처 부위의 감염을 유발하는 포도상구균의 경우, 1941년에는 그 계통의 거의 모든 세균이 페니실린에 의해 쉽게 제거되었으나 그로부터 불과 3년 만인 44년에는 몇몇 균주가 페니실린을 분해하는 효소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포도상구균의 95% 이상이 페니실린에 저항성을 보인다. 60년대만 해도 임질은 페니실린으로 간단히 치료할 수 있었다. 저항성을 보이는 균주들도 앰피실린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75% 이상의 임질균은 앰피실린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병원균과의 전쟁에서 우리의 전세가 날이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다.

새와 소가 지금 우리 사회를 유린하고 있다. 모름지기 ‘위험사회’는 우선 정보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광우병에 대한 우려가 촛불시위로 번지는가 하면 광우병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조류 인플루엔자(AI) 상황은 보도조차 되지 않고 있다. 광우병에 의한 사망은 수입 중단 또는 면밀한 검역으로 거의 완벽하게 막을 수 있지만, 만일 AI 바이러스의 고삐가 풀리면 훨씬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수 있다.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들에 질병을 유발하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병원균들은 혼자선 살 수 없고 다른 생물의 몸을 빌려야 하는 기생 생물이다. 이러한 기생 병원균들은 대체로 숙주에 대한 독성을 낮추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 학계의 통념이었다. 왜냐하면 숙주를 너무 일찍 죽게 만들면 스스로 자기 집을 불태우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사람이 온갖 몹쓸 전염병에 죽는 것일까? 다윈 의학 연구에 의하면 직접 접촉에 의해 전염되는 질병이 곤충을 비롯한 중간매체에 의해 전파되는 질병에 비해 훨씬 독성이 낮다. 직접 접촉에 의해 전파되는 병원균은 숙주를 쉽게 죽이지 말아야 함은 물론 숙주로 하여금 다른 숙주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감기 바이러스는 우리를 침대에 묶어두지 않고 자꾸 돌아다니게 하여 기침·재채기·가래 등의 수단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아간다. 그러나 모기가 옮기는 말라리아의 병원균은 숙주가 움직이기 어려워하면 할수록 모기가 더 쉽게 숙주를 공격할 수 있고 병원균 역시 더욱 쉽게 다른 숙주로 옮아갈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난 수의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다른 생물은 진화할 뿐 자신들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진화의 비밀을 알고 있는 우리 인간은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다. AI 바이러스의 이동을 어렵게 만들면 지나치게 독성이 강한 바이러스는 이미 감염된 숙주와 함께 죽고 약한 바이러스만 남는다. 철새들은 진화의 역사 내내 약한 바이러스들과 늘 함께 살아왔다. 만일 AI 바이러스가 이 땅에서 터를 다지기로 작정했다면 약한 놈들이 강한 놈들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 닭장 안의 유전자 다양성을 높이고 방역만 확실하게 해줘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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