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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보다 월드컵 응원단 닮은 ‘생활인의 저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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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 04면

3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쇠고기 협상 반대 촛불집회에 참가한 5만 명(경찰 추산)의 시민이 촛불을 흔들며 ‘고시 철회’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서울광장에는 쇠고기 협상 반대 시위가 시작된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집회를 끝낸 뒤 서소문·의주로 등에서 가두시위를 했다. 최정동 기자

1980년대 민주화를 외치던 투사들은 한낮 뜨거운 아스팔트를 달렸다. 하얀 마스크에 머리띠·화염병은 기본 장비였다. 자욱한 최루탄 가스 속을 달리다 보면 눈물·콧물로 뒤범벅되곤 했다.

촛불 든 ‘쇠고기 시위대’ 그들은 누구인가

그러나 2008년 ‘쇠고기 집회’는 다르다. 31일 오후 3시부터 쇠고기 집회 참가자들이 몰려든 서울광장은 야외 음악회장 같았다. 가족·연인·친구들끼리 나온 시민들은 잔디밭에 앉아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따가운 햇살 속에 화려한 색상의 양산이 여기저기 펼쳐졌다. 최동식(60·서울 신월동)씨 부부는 딸 선영(32)씨 내외와 함께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9개월 된 외손녀는 유모차에 태웠다. “아기 데리고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도 많다고 해서 가족 나들이를 포기하고 나왔습니다.” 사위 이현상(33)씨의 말에 최씨 부부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나올 생각”이라고 거들었다.

평일에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밤을 새운다. 투사가 아닌 생활인이기 때문에 일과가 끝난 뒤 참가하고 아침이 되면 다시 직장과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들은 동맹 휴교나 파업 대신 ‘시위 출퇴근’을 택했다.

옷차림도 평소 그대로다. 퇴근길에 정장을 입은 채로 참가한 회사원, 핫팬츠에 하이힐을 신은 여성도 자주 눈에 띈다. 바닥에 붙은 촛농을 긁어내는 여대생, 쓰레기를 치우는 40대 아주머니에게서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단이 연상된다. 31일 집회엔 월드컵 때처럼 태극기를 두른 젊은 여성도 보였다.

누군가가 “이명박 XXX!”라고 외치면 금방 “언어순화 합시다!”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한쪽에선 “비폭력! 비폭력!”을 연호한다. “담배 꽁초 버리지 마세요.” “광장에선 금연입니다.” 잔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리더가 없다, 조직도 싫다

지난달 29일 새벽 2시.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한 뒤에도 두산타워 앞 인도에 1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한 50대 남성이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가 1.5L 생수병을 앞뒤로 잘라 만든 확성기. 뒤쪽에 서 있던 그가 드디어 그 페트병 확성기를 잡은 것이다. 오른팔을 들어 주먹을 불끈 쥐어 본다. 그가 네 마디로 된 구호를 외치면 군중이 후렴처럼 다음 구호를 외칠 것이다. “강압수사!” 그가 애써 목소리를 짜냈지만, 아무런 호응이 없었다. “중단하라?” 누군가가 자신 없는 소리로 침묵을 깨자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그가 머쓱한 얼굴로 “힘내라 힘! 힘내라 힘! 젖 먹던 힘까지!”라고 외친 뒤 앉았다.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렇다. ‘쇠고기 집회’엔 정해진 구호조차 제대로 없다. “고시 철회, 협상 무효” “이명박은 물러나라”가 고작이다. 가두행진의 대오가 명동으로 갈지 종로로 갈지, 가두행진을 계속할지 해산할지도 쉽게 정해지지 않는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때문이다. “목소리 큰 쪽으로 몰려간다”는 불평이 참가자들 사이에서 나올 정도다. 촛불문화제는 ‘광우병 대책 국민회의’ 등 주최자가 있지만, 문화제가 끝난 뒤의 시위는 딱히 리더라고 할 사람이 없다.

집회 참가자들은 “(우리가) 계속 행진 방향을 못 잡고 경찰에 쉽게 포위되는 것은 리더가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 때문에 매일 밤 두세 시간씩 ‘지도부’ ‘조직화’ 문제를 놓고 토론하지만 결론은 하나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나온 시민인데 조직이 만들어지면 (배후가 있다고) 오해받는다” “매일 나오는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조직을 만드느냐” “주동자가 없으면 구속될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시위에 개입하려던 일부 진보단체에 강한 반감을 보이며 성토하기도 했다. 시위대를 지켜보던 한 노동단체 간부는 “집회만 10년째인데 이런 건 처음 본다”며 “조직 없는 시위가 가능할 줄 몰랐다”고 했다.

29일 새벽 시위에선 서울 중부경찰서 정보과장이 경찰 해산 방침을 통보하려다 시위대 지도부를 찾지 못한 채 할머니를 비롯한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경찰도 ‘대화 창구’를 찾지 못해 애를 먹는 셈이다.
 
가두시위와 함께 ‘장외투쟁’도

예전에는 시위 참가자와 비참가자가 뚜렷하게 갈렸다. 현장에 있으면 참가자이고 현장에 없으면 비참가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같은 이분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집회 장소로 가지 않고 장외(場外)에서 참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밤새워 인터넷으로 시위 생중계를 보고, 시위를 지지하는 글을 올린다.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리고 해외 언론에 e-메일을 보낸다.

이들은 라디오 진행 중 시위대를 비하하는 발언을 한 개그우먼 정선희씨를 “방송에서 하차시키라”며 방송국과 광고주에 항의 전화를 해 압력을 넣었다. 또 “광우병 소도 특정 위험물질(SRM)만 제거하면 안전하다”고 말한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을 겨냥해 ‘후원금 18원 보내고 영수증 요구하기 운동’도 벌였다. 언론사의 보도 방향에 따라 불매운동, 광고주에게 항의 전화하기 운동과 구독 운동, 소액 광고 실어주기 운동을 펼친다. 미국·캐나다에 거주하는 ‘미주 한인 주부들의 모임’은 쇠고기 협상에 반대하는 리본 달기 운동을 하고, 이를 담은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미국 쇠고기 판매하면 불매운동 하겠다’고 가슴과 등에 써 붙이고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는 이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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