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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생명은 완성된 존재 인간이 바꿀 수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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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나는 유전자 조작 기술을 활용해 녹아웃 마우스(knock-out mouse, 어떤 특정한 유전자 정보가 작용하지 않도록 한 실험용 쥐)를 만들었다. 이 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면 그 유전자 정보의 역할이 밝혀질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정밀 검사를 해봤으나 아무런 이상도,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7~9쪽, 프롤로그 중에서)

지난해 일본 서점가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아오야마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의 후쿠오카 신이치(福岡信一·49)교수가 쓴 『생물과 무생물 사이』가 최근 국내에서 출간됐다. 분자생물학자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천착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녹여낸 이 책은 일본에서는 55만부나 판매돼 과학서로는 드문 성공을 기록했다. 이 책은 자신의 어린시절 곤충채집 에피소드, 박사후 과정 연구실의 풍경 등을 문학적 감성으로 묘사한 에세이 형식을 통해 생명 과학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설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책에서 특히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는 부분은 생물의 ‘역동성’(다이너미즘)을 역설한 대목이다. 그는 자신이 시간과 노력을 들인 녹아웃 마우스로부터 ‘허무한’ 결과를 얻었지만, 더 큰 것을 얻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 개의 유전자를 잃은 마우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낙담할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한다. 동적 평형이 갖는 유연한 적응력과 자연스러운 복원력에 감탄해야 한다.”(235쪽) 생명은 기계와 달리 코드 하나를 뽑는다고 해서 쉽게 망가지지는 않는 유연성을 발휘하지만, 동시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인위적인 조작과 개입에는 쉽게 전체의 균형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경고다.

도쿄에서 60km 떨어진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 캠퍼스에 있는 연구실에서 신이치 교수를 26일 직접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동안이어서 대학원생처럼 보이는 신이치 교수는 ‘권위’하고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솔직하고 담백한 태도로 질문에 응해준 그는 인터뷰 말미에는 자신이 베르메르의 그림을 좋아하며, 가즈오 이시구로와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문학 작품을 즐겨 읽는다는 ‘개인적’ 얘기도 들려줬다. 또 기자를 실험실로 안내해 ‘애증’의 연구대상인 녹아웃 마우스를 보여줬다. 

-분자생물학 분야의 얘기를 갖고 일반 독자를 겨냥했다.

“과학의 출구가 반드시 전문적인 논문일 필요는 없다. 그래프와 현미경 사진 등은 실험 과정의 중간 단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리기 위해서는 과학자 뿐 아니라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는 것이 과학자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왜 이 책이 주목받았다고 보는가.

“전통적인 ‘생명관’이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속도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

-개인적 체험과 생명과학 얘기를 녹여낸 이야기 구조가 독특한데.

“지식을 요약·정리하는 교재처럼 쓰고 싶지 않았다. 건조한 사실만 나열하는 교재에는 정작 사람들이 어떤 의문을 품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 절절한 ‘인간적인’ 내용이 빠져 있다. 그런데 과학 분야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바로 그런 부분이다. 그래서 내 체험을 되짚으며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책 앞 부분에 뉴욕 부분이 나오는데, 그건 멋있게 보이기 위해 쓴 게 절대 아니다(웃음). 과학자로서 내 경험이 거기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한국 독자들에게 이 책을 스스로 설명한다면.

“한국에서는 줄기세포를 둘러싼 큰 스캔들(황우석 스캔들을 뜻함)이 있었다. 사람들은 생명과학 분야의 새로운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과학 분야에서 발전은 수많은 ‘이름없는 영웅’(unsung hero)들에 의해 이뤄졌다. 노벨상 등의 큰 과학상은 기본적으로는 물질의 발견에 주어진다. 그래서 새로운 ‘생각’과 ‘사상’을 가진 이들은 특히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나 과학에서도 ‘사상’을 갖는 게 매우 중요하다. 노벨상 업적이라는 것은 멀리서 히말라야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아주 깨끗하게 보이지만 산의 진짜 모습은 아니다. 이름없는 영웅들의 역사를 알리고 싶었다.” (그는 책에서 미 록펠러 대학의 노벨상 수상자들에 대해 말하며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 눈부신 능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얘기가 아니다. 어둡고 넓은 어둠 속에 잠긴 산기슭 수목의 희미한 술렁거림에 대해서다”(16쪽)라고 쓴 바 있다. 그의 독특한 시각과 문학적 글솜씨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반면 일본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1876~1928 )를 비판한 대목이 신랄하다. (※노구치는 매독, 소아마비, 광견병 혹은 황열병에 대한 연구로 당시에는 극찬을 받은 과학다. 신이치 교수는 책에서 “많은 병원체의 정체를 밝혔다던 그의 주장 중 대부분은 지금은 틀린 것으로 간주된다”며 “그의 논문은 어두운 도서관의 곰팡내 풍기는 서고 한 구석에 역사의 침전물”로 전락했다고 썼다. 그는 또 노구치에 대한 재평가가 “일본에서는 힘을 얻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위인전에 실리며 신격화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1000엔짜리 지폐에 얼굴이 나올 정도로 일본에서는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조명은 ‘가짜 빛’이다. 그를 폄훼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가 빠져버린 함정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광견병이나 황열병의 병원체의 바이러스는 너무나 미세해 당시 현미경으로는 실체를 볼 수 없었다. 히데요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일본에 대한 증오와 도피처로 삼은 미국에 대한 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일본인’이었다. 히데요는 중요한 발견 가까이 갔지만 손은 ‘닿지 않았다’. 그는 ‘이름없는 영웅’이 됐어야 했다.”

-녹아웃 마우스 실험에서 뜻한 결과를 못얻었는데.

“정말 실망스러웠고 곤혹스러웠지만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못받아들인다는 것은 데이터를 변조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웃음). 연구자들이라면 데이터를 조금만 변조하면 완벽한 성공이 눈에 그려지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접하곤 한다.”

-에필로그에서 “자연의 흐름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했다.

“이 책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다.생명을 조작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생명은 어떤 시점에도 완성이 돼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완성이 돼 있는 것을 인간이 조작하거나 개입하면 고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것을 잃게 된다.”

-과거에『프리온설은 사실일까?』『소고기, 안심하고 먹어도 되나?』등의 책을 썼는데. 광우병에 대한 입장은.

“광우병은 소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에 ‘개입’하면서 발생한 부작용 현상이다. 먹는 것과 관련된 것인 만큼 까다롭게 대처하는 것이 옳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정부의 결정에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 미국산 쇠고기는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도쿄=글·사진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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