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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조 백일장 5월] “초라한 아버지 운동화 보며 펑펑 울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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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한번은 현관 앞에 벗어둔 아버지의 운동화를 보면서 펑펑 운 적이 있었습니다. 접어신은 듯한 하얀 운동화가 말없이 닳고 닳아서 어찌나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던지 어린 맘에도 목 놓아 울었습니다. 아마 그날은 진흙인지 먼지인지 알 수 없는 얼룩들이 신발 곳곳에 묻어서 저를 더 아프게 했던 것 같아요. 그날 코를 골면서 누워계신 아버지를 꼬옥 가슴으로 품었던 기억이 나네요.”

중앙시조백일장 5월 장원작 ‘아버지의 운동화’가 지어진 배경이다. 계명대 미대 서양화과 2학년에 재학중인 김보람(19·사진)씨는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을 회상하며 이 시조를 썼다고 했다.

글쓰기의 기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계기를 통해 찾아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미대에 진학하기로 마음 먹은 김양은 담임선생님에게 야간자율학습을 빼달라는 편지를 쓴다. 미술 실기를 더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미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답변 대신 ‘글을 써보는게 어떠냐’는 것이 아닌가. 문학을 가르치던 담임선생님 눈에 김양의 문재(文才)가 들어왔던 것이다. 이후 각종 문학행사에 참가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술과 글쓰기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시조와의 인연도 그때부터다. 고향인 김천 직지사에서 열린 ‘백수(白水) 정완영 전국 시조 백일장’에 참가해 입상과 장원을 잇따라 차지하며 자신감을 갖게 됐다. 대학 입학 후 잠시 잊고 지냈던 문학 공부를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지난 겨울방학부터다. 정완영·유재영·이승은 등 시조시인들의 작품집을 두루 섭렵하고, 산문집도 가리지 않고 읽으면서 예쁜 단어나 문구를 만나면 틈틈이 메모 해둔다고 했다.

어느새 글과 그림은 가장 중요한 일상이 됐다. 이를 통해 삶이란 존재의 이유를 찾아가는 깨달음의 여정이란 생각도 하게 됐다.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건, 연필을 잡고 글을 쓰건, 창작은 고통이고 수행이며 나를 다듬을 수 있는 유일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과 글쓰기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과 글을 함께 어우를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시조의 매력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시조는 낡고 어려운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 시조를 접했을 때는 그랬으니까요. 그렇지만 지금은 현대시조, 젊은 시조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유연한 가락에 부담 없이 읽히는 시조가 늘고 있어요. 저 역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도전의 장’을 활짝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영대 기자

[장원] 아버지의 운동화

            김보람

진흙인지 먼지인지 야윈 발을
물고 있는
뒷굽 닳은 운동화 아버지의
얼룩들이
제 가슴 어린 섬돌 위
아픔으로 남습니다

구긴 지폐 손에 놓고 쓸쓸히
돌아서며
밤 새워 적으셨다는 부치지 못
한 편지
정말로 길고 슬픈 꿈
아직도 꾸십니까

먼 길을 홀로 걸어 딸은 이쯤
서 있는데
지줏대에 기대 있는 대추나무
볼 때마다
깊어진 두 눈자위에
맑은 물이 고입니다

[차상] 독도법

            김대룡

순찰중인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어느 중년 남성의 느닷없는 노상방뇨
와중에 오줌은 흘러 길 위에 길을 만든다

유속이 느려진 때 묻은 발걸음에
고장 난 나침반의 자침은 휘청인다
갸우뚱 몸을 기대는 바스러진 저 뒷굽!

탐색 범위 좁혀가는 아뜩한 좌표면 위
아딧줄*에 엉켜버린 기호들이 풀어내는
지도 속 등 푸른 경계, 몇 올의 새치 같은
귀가의 얕은 골로 굽이치는 등고선
지상의 한 모서리에 고여 가는 시간들이
축척의 깊어가는 밤, 골목길을 밝힌다

*아딧줄 : 바람의 방향을 맞추기 위하여 돛에 매어 쓰는 줄

[차하] 꿈꾸는 교실

            송영일

노을이 길을 내자
하늘 따라온 구름이
한낮을 몰고 간
밤의 기호로 떠올라
시간의 간극을 잰 듯
별빛으로 누워있는 곳

저곳에서 좌표 하나
끄집어내 촛불 켜놓고
마침맞게 쏟아놓아
반짝이는 활자들을
손안에 펼쳐진 책 속
깃발로 꽂아놓는다

집착하면 할수록
먼 곳 있는 마루누리에
산등성이 넘어가는
늦바람 꽃술 흔들어
연초록 우거진 숲 속,
씨방 가득 채운다


■이달의 심사평

5월의 화두는 단연 ‘생명’이다. 그 생명의 가장 분명한 상징은 초록. 초록이 차츰 짙어지면서 바야흐로 생명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중앙시조백일장에도 초록의 신명이 지핀 것일까. 이달에는 예상을 훨씬 웃도는 130 편의 작품이 쏟아져 전에 없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특히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의 투고가 꾸준히 늘어나는 데다, 연거푸 수상의 영예를 안는 것도 퍽 고무적인 일이다.

숙고 끝에 가려낸 김보람씨의 ‘아버지의 운동화’가 이달의 장원이다. 야윈 발을 감싼 뒷굽 닳은 아버지의 운동화. 거기서 눈과 비의 길을 걸어온 ‘아버지의 얼룩들’을 보고, 아버지의 ‘길고 슬픈 꿈’을 떠올린다. 시각이 예사롭지 않다. ‘부치지 못한 편지’와 ‘구긴 지폐’에 들어 있는 아버지의 속내를 딸은 묻지 않고도 다 안다. ‘눈자위’에 고인 ‘맑은 물’이 그 증거다. 시상을 앉히고 뜸을 들이는 솜씨가 전혀 설지 않다. 하나, 안정된 묘사에만 치중하다 보면 자칫 깊이를 놓치기 쉽다. 대상에 타협하지 말고 과감하게 의식을 열어갈 일이다.

2, 3월에 이어 또 ‘아버지’를 다룬 작품이 장원을 차지했다. 작품 본위로 뽑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긴 하나, 최근 들어 혈육에 대한 연민이나 일상의 애환을 드러낸 작품이 두드러지는 추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도 하나의 경향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일부러라도 이를 깨부수고 나서는 것도 새로운 시조 쓰기의 한 방법이 되지 않겠는가. 차상은 김대룡씨의 ‘독도법’. 이 작품은 시의 발상도, 그 발상을 풀어가는 방법도 참 독특하다. 도시적 언어로 도시적 삶의 풍경을 밀어 올린다고나 할까. 방향을 잃은 채 휘청거리고, 그러면서 ‘엉켜버린 기호들’ ‘고장 난 나침반의 자침’을 제대로 읽어가는 게 화자 나름의 독도법인 셈이다. 시어와 시어의 잦은 충돌로 수사가 매끄럽지 못한 점은 자연스러운 가락의 운용과 서정적 착색으로 풀어갈 부분이다. 수상의 마지막 한 자리는 송영일씨 차지다. 그는 ‘꿈꾸는 교실’을 통해 남다른 감각을 보여준다. 노을-구름, 한낮-밤, 좌표-촛불, 책-깃발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연상작용을 통해 배움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의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어딘가 설익은 듯한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표현의 적확성 확보에 더 고민이 필요하다.  

<심사위원 : 박기섭·이지엽>

◇응모안내=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 매달 말 발표합니다. 응모 편수는 제한이 없습니다. 매달 장원·차상·차하에 뽑힌 분을 대상으로 12월 연말장원을 가립니다. 연말장원은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자(등단자격 부여)의 영광을 차지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겐 각각 10만·7만·5만원의 원고료와 함께 『중앙시조대상 수상작품집』(책만드는집)을 보내드립니다. 응모시 연락처를 꼭 적어주십시오.

◇접수처=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10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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